본문 바로가기

다크에덴/etc.

다크에덴 :: 소설 번외편 "아우스터즈" [15화 ~ 21화]

728x90
반응형

번외편 "아우스터즈" 소설은 21화가 최종화입니다

참고로 (다크에덴 세계관에서)시대적 배경은 아우스터즈가 처음 등장한 15세기로 추정됩니다. 이 당시의 아우스터즈는 '뱀파이어에게 물린 인간이 치료된' 1세대(하프 뱀파이어)입니다. 성별도 존재하나 자손을 남기는 것은 불가능한 세대죠

1세대의 끝에서 아우스터즈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전멸하였으나 가까스로 자손을 남기게 되었는데... 성별이 없으며 알로 번식하는 '2세대 아우스터즈'가 태어나게 됩니다(유저가 플레이하는 아우스터즈는 2세대입니다)

소설에서 보면 '1세대 아우스터즈'는 치료 과정의 결과인지? (라비니아)인간과는 외모가 다르다고 하는데요. 초창기 게임 상의 '라비니아'의 얼굴을 보면 그렇게 느껴지지는 않았거든요...? 얼굴에 굵은 주름이 있기는 했어도, 세월이 흘러서 늙어서 그렇게 보이는 정도랄까요? 소설과는 다르게 얼굴 전체적으로도 인간처럼 보이고요

그 부분은 나이가 들면서 외모가 개선이 됬다던지, 소설처럼 NPC 외모를 만들면 이상하니까 넘긴건지... 알 수가 없네요


목차


15화 : 껍질 3


고동치는 맥박이 육신을 집어삼키며 몸 속이 온통 심장으로 들어찬 것 같았다. 다리는 움직이고 있었지만 발바닥은 마치 물위를 걷는 것처럼 아무런 느낌도 전해지지 않았다. 이성은 그를 타일러가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인근 주민처럼 보이도록 강요했지만, 육신은 감성 쪽에 더 큰 지배를 받고 있었다.

무언가 이상하다. 탈주죄는 사형이다. 들키면 죽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지금 나는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거지? 아우스터즈가 되는 것이 과연 더 나은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무사히 통과한다 해도 시간 내에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다. 재수가 없으면 마을로 통하는 입구에서 보초가 졸고 있을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뱀파이어가 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일리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예전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칼에 대한 공포를 간신히 깨트리고 그에게 일어난 육체적 변화를 깨달으면서 자신을 전설 속에나 나오는 영웅이라도 된 양 착각 속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진정한 약자는 만용조차 부리지 못한다. 그는 지금 거꾸로 육체가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용기 혹은 만용의 부리로 나약한 겁쟁이라는 껍질을 두들겨나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리에는 어느 틈에 기사단의 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기사들은 그 더러운 농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자신의 동료들이 건너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거구의 기사들이 말 위에서 중장갑을 두르고 있으니 마치 거인을 보는 듯 했다. 일리에는 왜소한 자신의 체격이 한없이 더 작게만 느껴졌다.

‘먼저 말을 꺼내야 한다. 그게 자연스럽다. 먼저....’

“저.... 아....”

일리에는 자신에게 신경도 쓰지 않는 기사들을 향해 입술을 움직여보려고 애썼지만 혀가 굳어 제대로 놀릴 수가 없었다.

“좋은 아침이네. 헌데 무슨 일이지?”

나이 많아 보이는 한 기사가 리드미컬한 말의 움직임에 맞춰 상체를 까닥거리며 다가왔다. 가슴에 그려진 커다란 십자무늬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나으리.”

부드러운 음성과 인자해 보이는 푸른 눈빛이 그를 조금 진정시켜주었다.

“저, 지금은 다리를 건너갈 수 없는 건가요?”

“음, 지금 저 병사가 건너오면 가도록 하게. 다리가 좁고 약해 보여서....”

“예....”

일리에는 가슴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기사는 다른 기사에게 잠시 건너기를 멈추라는 신호를 보내라고 지시했다. 깔끔하게 손질된 수염이 매우 잘 어울리는 그 노기사는 제법 지위도 높아 보였다.

“자네 마을은 아직 괜찮은가?”

“아, 저.... 그... 예. 성에서 많이 떨어진 변두리라서요. 아직은 괜찮습니다.”

“흠…, 다행이군.”

다리를 건너던 기사가 거의 끝에 도달하였다. 좀 전에 명령을 받은 기사가 손을 크게 흔들더니 반대편으로 수신호를 보냈다.

“자, 이제 건너도 좋네.”

“감사합니다, 어르신.”

일리에는 그 기사를 향해 인사를 꾸뻑하고는 몸을 돌렸다.

“잠깐...! 너는 뭐냐?!”

까마귀처럼 찢어지는 듯한 음성이 그를 불러 세웠다. 뒤를 돌아보니 날카로운 눈매의 호리호리한 기사가 그를 잡아먹기라도 할 듯 쏘아보고 있었다. 눈 밑으로 길게 찢어진 흉터는 그의 인상을 더 날카롭게 만들고 있었다.

“아, 이 사람은 지역 주민인데 다리를 건너려 하고 있네.”

“기사단장님. 시간이 없습니다. 이런 녀석 하나 때문에 지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 어쩌겠나? 우리가 모두 건너고 나면 해가 중천일 텐데. 그러지 말고 얼른 보내주도록 하게.”

기사단장이라고 불리었던 자가 계속 일리에의 편을 들어주자, 그는 일리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봐. 너. 저쪽은 왜 가려고 하는 거야?”

“그게... 저, 땔감을 가지러 갑니다.”

“도끼도 땔감을 담아올 자루도 하나 없이 말인가? 나무는 이쪽에도 많이 있지 않나?”

실수였다. 일리에는 눈 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아니, 이... 이쪽 나무는 매운 연기가 많이 나서 땔감으로 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마른 나무들을 주워오기만 하면 되는데다 넝쿨로 엮어 오면 자루가 없어도 충분합니다.”

일리에는 식은땀을 흘리며 간신히 변명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엉겁결에 흘러나온 변명치고는 꽤 그럴싸하다고 생각되었다.

“음..., 그래도 이 녀석 뭔가....”

하지만 그 무서운 눈빛의 사나이는 쉽사리 넘어가지 않았다.

“자, 자.... 그만하게. 우리가 여기에 온 이유가 마을 주민들을 괴롭히기 위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기사단장은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일리에에게 얼른 건너가라는 듯 눈짓을 보냈다.

일리에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인 후 얼른 빠른 걸음으로 다리 위에 올라섰다. 그 기사단장이라는 분이 정말 고맙게만 느껴졌다. 그때 그 눈 밑에 흉터 난 기사가 기사단장의 말을 밀쳐가면서 앞으로 나섰다. 그는 소리를 지르며 창을 내밀어 일리에를 멈춰 서게 하였다.

“...이 녀석!!! 거기 서라!”

사신의 낫처럼 길게 휘어진 창 끝이 어느 틈에 일리에의 목둘레를 차갑게 감싸고 있었다. 일리에는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놀라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길카 부단장! 대체 왜 이러나? 명령이니 그자를 놔주게!”

온화해 보이던 기사단장도 마침내 화를 내며 그를 제지했다.

“모르면 가만히 계십시오! 이 녀석 이 마을 주민이 아닙니다.”

하지만 부단장은 그 말에 꿈쩍도 하지 않으며 되려 큰 소리로 받아 쳤다. 기사단장은 그 말에 놀라 일리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탈주병사 같습니다.”

부단장은 얼어붙듯 서있던 일리에의 웃옷 어깨부분을 갈고리모양의 창 끝으로 잡아 찢었다.


16화 : 흔적 1


일리에는 영문을 모른 채 길카 부단장이 찢어낸 어깨 쪽을 내려다보았다.

가축이나 노예도 아니고 병사의 어깨에 낙인 같은 것이 찍혀있을 리는 만무했다. 일리에는 다시 고개를 들어 의아해져 부단장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부단장은 의기양양하게 그의 어깨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반도 안 되는 확률이었지만 빙고인 것 같군. 보십시오. 싸구려 갑옷의 어깨 매듭 자국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나란하고 긴 굳은 살이 생길 리가 없죠. 가죽갑옷을 입고 다녔더라면 그래도 목숨을 오래 부지할 수 있었을 텐데 안됐구나.”

지금껏 단 한번도 자신을 보호해준 적도 없이 무겁게 어깨만 짓눌러왔던 갑옷이었다.

기나긴 행군 중에 몇 번이나 벗어 던지고 싶었는지 모른다. 귀족들이 보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자신에게는 과분할 정도로 값진 갑옷이었기에 지금껏 소중히 여겨왔을 뿐이었다. 일리에의 집은 이런 값비싼 철 갑옷을 살만한 여유는 조금도 없었다. 다른 소작농들과 마찬가지로 하루하루 겨우 입에 풀칠해가며 살아가기 바빴다. 다만 이 갑옷은 일리에의 할아버지가 7년 전쟁 때 전장 속에서 주운 것으로 당신의 목숨을 몇 번이나 구해준 고마운 물건이라 하여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리에가 이것을 물려 입고 출정할 때는 가족들 모두가 갑옷이 그를 지켜줄 것이라고 하였다.

헌데 그러한 갑옷이 자신의 발목을 잡게 될 줄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일리에가 이에 대한 변명에 대한 궁리를 미처 끝내기도 전에 갈카는 그가 탈주병이란 증거를 계속해서 예리하게 지적해 나갔다.

“하긴 그 지독하게 역겨운 남부 사투리때문에라도 어차피 들킬 수 밖에 없는 노릇이었지만 말야. 언제 들어본 것 같은 말투라 했더니만.... 어디 그 어설픈 말투로 다시 한번 주둥이를 놀려보시지. 나름대로는 사투리를 숨기려고 한 것 같았는데 어림도 없는 짓이지. 멍청한 남부 녀석들.... 어때, 무투? 너한테는 상당히 친숙하게 들렸을 법했을 텐데...."

부단장은 기사단장의 뒤에 서있던 한 기사를 돌아보며 말했다. 남부 출신의 귀족인 듯한 그 기사는 그런 그를 무섭게 쏘아보기만 하다 말을 돌려 뒤로 물러섰다.

“게다가 이 겨울에 넝쿨이라니 날 바보로 보는 거냐? 하여튼 남부녀석들이란.... 단장님, 어쩌실 겁니까? 탈주 병사에 대한 처분은 잘 알고 계실 텐데요.”

갈카 부단장은 일리에를 비호했던 단장을 얄밉게 빈정거리며 말했다.

“크흠...."

기사단장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반면 부단장은 무엇이 그렇게 신이 나는지 점점 목소리가 커졌다. 그는 창 끝을 다시 일리에의 턱 아래로 가져갔다. 그리고 그의 턱을 들어올렸다.

“너 어디 소속이냐?”

“.......”

일리에는 이대로 달려 도망쳐버릴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지금이라면 누구에게도 달리기로는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반대편에서 기다리고 있는 기사의 수도 만만치 않은데다, 말을 상대로 하는 경주라면 그도 그리 승산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어라, 이 녀석 봐라? ...응?”

그는 무언가 발견이라도 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창을 거두고 말에서 내려 일리에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머리카락을 휘어 잡아 뒤로 끌어당겼다.

“너 이 녀석, 뱀파이어에게 물렸구나!!”

그는 일리에의 목에 뚫려있는 시커먼 2개의 구멍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다른 병사들은 그 말에 놀라 무기를 꺼내며 주춤거렸다.

“단장님, 지금 당장 죽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녀석 언제 괴물이 되어버릴지 모릅니다.”

그 말에 기사단장도 말에서 내려와 일리에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조용히 물었다.

“어째서 굳이 우리를 속여가면서까지 이 다리를 건너려 했던 거지?”

단장의 목소리는 아까처럼 온화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제법 차분했다. 갈카 부단장은 그의 엉뚱한 질문에 말문이 막힌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우리를 보고도 도망가지 않고 이곳을 건너려 했으면 무언가 이유가 있었을 텐데.... 얘기하지 않겠나?”

일리에는 그의 눈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그다지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라면 현재 그가 처해진 상황을 이해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일리에는 그 동안 있었던 일을 모조리 털어 놓았다. 물론 감옥에 갇혀 있다가 탈출했다는 사실과 라비니아의 일만은 빼놓았다. 그리 좋지는 않은 언변이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절박한 상황을 잘 전달해주고 있었다. 갈카도 그의 머리채를 놓아주고는 그의 말을 얌전히 듣고 있었다.

“흠..., 그랬군.”

기사단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이봐 어떤가. 비록 탈주병사이기는 하지만 적병이 되고 싶지 않아서 한 일이니 용서해주는 것이 어떻겠나?”

“그럴 수는 없습니다. 거짓말일겁니다.”

“무녀 카리사스의 이름이라면 나도 들어본 적이 있네. 게다가 그게 아니라면 이 친구가 굳이 우리 앞에 나타난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해볼 수 있겠나?”

“.......”

갈카 부단장은 얼굴이 뻘개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 이제 정말로 가보도록 하게. 책임은 내가 지도록 할 테니.”

기사단장은 일리에에게 말했다.

“설사 사실이라 할지라도 가는 도중에 괴물이 되어버리면 어떡합니까? 단 하나의 적병이라 해도 그 수가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면 찬성할 수 없습니다.”

“흐흠.... 자네 말이 맞군. 그렇다면 내 말을 타고 가면 좀더 시간을 단축할 수 있을 거야. 이 보게, 이 말을 가져가도록 하게.”

그는 말의 고삐를 끌어당겨 일리에에게 내밀었다.

“예?”

일리에는 너무 놀라 되물었다. 귀족이, 그것도 기사단장이라면 매우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이 일개 농민 출신의 병사에게 이런 호의를 베푼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아니!? 그건 포페스쿠님한테 폐하께서 직접 하사한 말이 아닙니까?”

그의 옆에 있던 한 기사도 놀라며 소리치듯 말했다.

“그러니까 중한 일에 쓰려는 것 아니겠나. 자, 얼른 이 말에 올라타게.”

“아니..., 저, 저는....”

일리에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아 자꾸 말이 제대로 나가지 않았다.

“자네가 아직도 정부군에 충성한다면 그 증거로 내 말에 복종하도록 하게. 국왕 폐하 직속 성기사단의 단장 포페스쿠의 이름으로 명하니 이 말을 타고 무녀 카리사스에게 다녀오도록 하게.”

이렇게까지 말하는데야 누구도 이를 말릴 수도 거절할 수도 없었다.

“예, 예.... 감사합니다.”

일리에는 고개를 꾸뻑 숙이며 그 고삐를 건내받았다.


17화 : 흔적 2


갈카 부단장은 터져 나오려는 분통을 억지로 눌러 담고 있었다. 꼬랑지를 흔들거리며 멀어져 가는 일리에의 말 엉덩이만 쳐다보고 있자니 자신이 완전히 바보취급 당한 기분이었다.

“자, 자. 이제 우리도 다시 시작하도록 하세. 점심 전에는 모두 다리를 건너야 할 것이 아닌가.”

갈카는 기사단장의 여유로운 말투에 더 화가나 세차게 땅바닥을 한번 걷어차고는 다시 말 위로 올랐다. 끓어오르는 분노가 진정이 되질 않았다. 그러다 문득 무슨 생각이라도 난 듯 단장에게 의견을 제시했다.

“기사단장님, 아무래도 반대편에서 제대로 통제가 안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차라리 지금 제가 얼른 건너가서 신속히 이동시키는 게 났겠습니다.”

“아, 그래…. 그게 좋겠군. 수고하도록 하게.”

“예, 알겠습니다.”

갈카는 얼른 말을 몰아 반대편으로 건너갔다. 일리에는 이미 숲의 가장자리를 따라 꺾어져 보이지도 않았다.

갈카는 기사들을 몇 명 줄을 세워 앞에 가는 사람이 3/4정도 건너면 바로 다리를 건너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기사들이 건너기 시작하자 평소 자신을 잘 따르던 심복 세 명을 슬쩍 뒤로 불러냈다.

“너희들 아까 기사단장님의 말을 타고 다리를 건넜던 더러운 농부 보았지?”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예, 봤습니다.”

“그 놈 대체 뭐 하는 놈입니까?”

“자세한 것은 나중에 설명해줄 테니 지금 당장 그 놈을 쫓아가라. 가서 죽여버려.”

톤은 낮았지만 매우 강경한 어조였다.

“예? 그래도 괜찮습니까?”

“기사단장님이 보낸 줄 알았는데요?”

그들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멍청한 단장이 속은 거야. 그 자식, 뱀파이어한테 물린 놈이라고.... 그대로 놔뒀다가는 언젠가 적으로 다시 만나게 될 거다. 벌써 변했을지도 모르니 조심하고.... 어쨌든 빨리 가.”

“예. 알겠습니다.”

“아, 말을 가지고 올 필요 없어. 차라리 죽여버려.”

그들은 슬그머니 무리를 빠져나가 숲으로 사라지더니 고삐를 세차게 흔들어 말을 달렸다.

‘포페스쿠 님이라고 하였던가?’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사람인지 확신이 서지는 않았지만 포페스쿠 장군이라면 7년 전쟁을 비롯하여 수많은 전쟁에서 공적을 세운 에슬라니아의 살아있는 영웅이었다.

‘하지만 그 분이라면 벌써 쉰 살이 넘었을 텐데.... 아직도 전장을 누비고 다닌단 말인가?’

아까 그분은 40대 중반쯤으로 보이기는 했지만 좀 젊게 보인다면 그 포페스쿠님이 맞을 수도 있을 법했다.

‘물론 예전처럼 앞장서 직접 칼을 휘두르지야 않겠지만 그 분이 맞는다면 정말 대단하군.’

일리에는 안주머니에서 라비니아에게 받았던 목걸이를 꺼내 걸었다. 숲 가를 따라 어느 정도 달려왔으니 이제 슬슬 말을 천천히 몰아가며 이 증표를 잘 보이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그때 뒤에서 세찬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저 녀석 맞지?”

“응, 이 근처에서 말을 타고 달리는 농부가 그 놈말고 또 누가 있을라고....”

일리에를 추격하던 세 기사 중 앞서 달려가던 검은 말을 탄 키 큰 기사가 그를 향해 소리쳤다.

“어이, 거기 서라!!”

일리에는 말 고삐를 늦추며 그들을 향해 돌아보았다. 부리나케 달려오는 그들의 모습에서 무언가 이상했다. 그는 여차하면 곧바로 말을 달리게 할 준비를 하고서 그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무슨 일입니까? 저는 기사단장님의 명령을 받고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들은 일리에의 말에 대꾸하기 전에 먼저 그를 둥그렇게 둘러쌌다.

“알고 있어.”

그들의 창이 일리에의 가슴께를 겨누었다.

“봤어?”

“응.”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일리에를 두고 자기들끼리 무언가를 확인하는 듯 했다.

“목의 그 상처는 뱀파이어에게 물린 것이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기사단장님께서 이것을 고치고 오라며 직접 말을 빌려주셨습니다.”

일리에는 걸릴 것이 없다는 듯 당당하게 말했다.

“그런가? 하지만 정무대신 라이누스님이 제정하신 새로운 법에서는 뱀파이어에게 물린 자를 즉각 사형시키도록 되어있다.”

“포페스쿠님은 너무 무른 게 탈이라니까.”

“잔소리말고 말에서 내려라.”

키 큰 기사가 창 끝을 아래로 흔들며 명령했다. 일리에는 순순히 그의 말에 따랐다. 지금의 그라도 무기도 가지지 않은 채 정예기사 3명을 상대하는 대는 자신이 없었다. 그는 슬쩍 곁눈질로 숲 가를 살펴보았다. 일단 옆을 가로 막고 있는 창을 빠져나가기만 하면, 숲 속으로 뛰어드는 데는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가급적 울창한 숲 속으로만 도망 다니면 오히려 말을 탄 쪽이 기동력에서 열세일 수 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땅 바닥에 엎드려라. ...손을 머리 위로 올려. 그래, 그렇게....”

일리에가 엎드린 채 손을 깍지 끼고 머리 위로 얹어두자 두 개의 창이 목 옆의 땅속에 박히며 X자로 눌러댔다. 차가운 창이 목 뒤의 양쪽을 짓누르자 좀 더 일찍 틈을 보아 도망가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그들의 처형 집행은 잠시도 지체 않고 이루어졌다.

“운이 나빴던 것뿐이니 너무 원망은 말거라.”

키 큰 기사는 그렇게 읊조리듯 말을 하고는 일리에의 등 한가운데를 향해 창을 내리 꽂았다.


18화 : 흔적 3


일리에는 몸을 옆으로 비틀어 간신히 창을 피했다. 그의 심장을 노리던 창 끝은 둔탁한 소리와 함께 허망하게 땅 속으로 깊이 파고 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미처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제대로 인지하기도 전에 일리에는 옆에 서있던 말의 무릎관절을 세차게 걷어찼다. 말은 갑작스런 고통에 놀라 비명 같은 울음소리를 내뱉으며 몸을 들어 일으켰고, 그 말에 타고 있던 기사는 균형을 잃으며 땅바닥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덕분에 일리에의 목을 짓누르고 있던 두 개의 창 중 하나가 주인을 잃었고, 그는 그 창을 뽑아 쥐며 몸을 굴렸다.

“이 자식이...!!”

반대편에서 일리에의 목을 짓누르고 있던 기사가 창을 빼 일리에에게로 내질렀다. 하지만 그는 몸을 뒤로 던져 창이 닿는 범위 밖으로 도망친 후였다.

“홀리 페터!”

키 큰 기사가 팔을 뻗으며 기묘한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푸르스름한 번개 덩어리 같은 것이 일리에의 발목을 휘감았다.

“어어엇....”

일리에가 숲으로 발을 내디디려는 순간 알 수 없는 힘이 그의 몸을 공중으로 띄우며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였다. 마치 거인이 손가락으로 집어 당기는 듯한 기묘한 느낌이었다.

“달아나는 뱀파이어를 잡아두기 위한 마법이다. 실전에서 써보기는 처음이지만 꽤 쓸만하군.”

일리에는 다시 그 자리를 벗어나보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번번이 그의 주위에서 열 걸음을 채 벗어나지 못했다.

“소용없는 짓은 그만두지. 성령의 힘을 거역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일리에는 악에 바친 얼굴로 그들을 다시 돌아보았다. 낙마한 병사는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땅바닥을 기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말도 고통을 이기지 못하며 세 발로 겅중거리다 주인의 머리를 뒷발로 밟아버리고 말았다.

‘두 명....’

일리에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활동반경에 제약을 받으며 두 명이나 되는 정예기사를 상대할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달아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최대한 빨리 해치우는 편이 났다.

“이얏...!”

일리에는 주문을 건 키 큰 기사를 먼저 해치우고 달아날 요량으로 그를 향해 창을 내뻗었다. 챙강! 하지만 그보다 빨리 옆에 서있던 기사가 창을 휘둘러 그것을 걷어냈다.

“저 녀석 창으로 싸워보겠다는데 직접 상대하겠나?”

키 큰 기사는 놀랄 것도 없다는 듯 여유 있게 동료에게 말을 걸었다.

“뭐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폼을 보아하니 처음 잡아보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저승 선물로 창 쓰는 법을 보여주라는 거지.”

“그것도 나쁘진 않겠군.”

일리에의 창을 걷어냈던 기사가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말에서 내렸다. 둘 다 옆에 쓰러져 있는 동료는 안중에도 없는 듯 했다.

“영광으로 생각해라. 이 녀석은 우리 부대에서 마창 기술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이니....”

“하지만 공평하게 말에서 내린 상태에서 상대해 주도록 하지.”

그는 창의 중간부분을 비틀어 뽑아내며 말했다.

“마창은 너무 길어서 그냥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이렇게 비틀면 길이가 줄어드니까 참고하라고....”

그들은 일리에를 한껏 깔보며 주절거렸다. 하지만 일리에는 그의 말대로 순순히 창을 분리해 내었다.

“그래, 그렇지. 준비됐나? ...그럼 간다.”

그는 기합소리와 함께 한 달음에 일리에와의 거리를 좁혀갔다. 그의 키 매서운 속도로 일리에의 머리를 노렸다. 하지만 일리에의 몸이 그보다 빨리 옆으로 피하며 창을 뻗어 그의 가슴을 노렸다. 그는 순간 놀라는 듯했지만 잽싸게 창의 궤도를 바꿔 그를 휘둘러 쳤다. 창에 머리를 얻어맞으며 일리에의 몸이 옆으로 나동그라졌다.

“제법인데?”

그는 쓰러진 일리에를 공격하지 않고 그가 일어서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표정이 좀 전과는 달리 조금 진지해져 있었다. 일리에는 그를 노려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일리에는 그보다 옆에 있는 키 큰 기사가 더 신경 쓰였다. 구경만 하겠다는 척 가만히 말 위에서 앉아있기는 했지만 언제 끼어들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좀 전의 공격 기회를 놓치지 말았어야 했다.

‘기회는 한번뿐이다....’

그 기사는 먹이감을 눈앞에 둔 야수처럼 그 주위를 빙빙 돌며 공격할 틈을 찾고 있었다. 일리에도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그를 따라 몸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때 그의 뒤편에 아까 분리해둔 창의 뒷부분이 떨궈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얏-!!!”

그가 바로 창 앞으로 움직인 순간 일리에는 커다란 기합소리와 함께 몸을 던지며 창을 휘둘렀다. 그는 가볍게 몸을 뒤로 피하며 창이 닿는 범위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땅바닥에 굴러다니던 창의 둥근 봉을 밟고 말았다. 그의 두 다리가 허공을 휘저으며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크아악-.”

그것으로 승부는 어이없이 결정되었다. 일리에의 창 끝은 틈을 놓치지 않았고, 고약한 비명소리와 함께 거만한 기사의 붉은 피를 잔뜩 뒤집어 쓰고 있었다. 일리에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창을 뽑아 그 동안 구경만 하고 있던 키 큰 기사를 겨누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일리에를 여전히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멍청한 자식.”

그는 목이 반쯤 떨어져나가 처참하게 죽어버린 동료의 명복 빌기를 냉정한 한마디 말로 끝내버리고는 말에서 내려왔다.


19화 : 흔적 4


키 큰 기사는 창을 한쪽 옆에 찔러 세워두고는 칼도 뽑지 않은 채 고개를 양 옆으로 까닥거리며 지껄였다.

“좋아. 덤벼라.”

‘뭐 하자는 거지? 자신 있다는 걸까? 아직도 나를 깔보고 있다면야 고마운 일이지만….’

일리에가 그의 알 수 없는 의중에 주춤거리자 그가 말했다.

“뭐야? 칼이라도 뽑기를 기다리고 있는 건가? 난 이게 무기다.”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가슴을 가리켰다. 일리에는 더욱더 어리둥절해진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거야? 바로 이 갑옷이 무기란 말이다. 그러니 맘 놓고 덤벼라.”

듣고 보니 그의 갑옷은 유난히 모양새가 복잡했고 장갑도 두꺼웠다.

‘저 무게를 이용해 부딪혀오는 것인가? 맞았을 때를 생각하면야 아찔하겠지만 적어도 저런 중장갑을 입고 있는 녀석에게 얻어맞을 정도로 느려터진 놈이라면 굳이 그렇게 싸울 필요도 없을 텐데....’

일리에는 그의 움직임을 시험해볼 요량으로 창을 슬쩍 내질러 보았다. 그는 생각보다 빠르게 허리를 비틀어 그것을 피하였다.

“이봐, 그런 어줍잖은 찌르기로 날 시험해볼 생각이라면 그만 두시지. 이제 와서 용기가 사라진 건 아니겠지?”

도발을 위한 것인지 그는 싸움을 지켜볼 때와는 달리 쉬지 않고 주절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일리에는 아무 말없이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뭔가가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하지만 언제까지 시간을 끌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봐 괴물로 변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냐? 나 역시 한가하게 네놈이나 상대하고 있을 여유는 없어. 기회를 줄 테니 먼저 오라고.... 이번엔 제대로 힘 좀 실어서 말이야.”

일리에는 그의 도발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겁쟁이 같은 성격이 오히려 그를 침착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먼저 공격할 생각은 없는 놈이다. 시간은 충분하다.’

그는 차분히 그를 관찰하며 모책을 찾았다.

‘아까와 같은 속임수가 두 번이나 통할 리는 없다. ...하지만 처음 당해보는 방향에서의 공격이라면....’

일리에는 창을 거꾸로 쥐고 그 기사를 향해 몸을 날렸다.

“하앗-!”

그의 몸은 하늘을 날 듯의 뛰어올라 키 큰 기사의 머리 위까지 솟구쳤다. 그 키 큰 기사로써는 전혀 뜻밖의 위치에서의 공격이 허를 찌른 듯 그는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그러나 일리에의 창 끝이 그의 양 미간을 향해 떨어지려는 순간 그의 갑옷이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꿈틀거리며 부풀어올랐다.

챙강!

갑옷과 창이 부딪히면서 발생한 충격량이 손바닥에 고스란히 전해지면서 일리에의 손에서 창이 퉁겨져 나갔다. 그리고 그는 기묘하게 변해버린 갑옷을 뒤집어쓰고 서있는 기사의 발 앞에 떨어졌다.

퍽!

두꺼운 쇠 덮개가 씌워진 장화가 바닥에 나동그라진 그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폐와 심장이 일순 기능을 정지한 듯 숨통이 틀어졌다. 그는 옆구리를 움켜쥔 채 몸을 굴려 도망가려고 했다. 하지만 기사의 손이 먼저 그의 뒷덜미를 낚아 챘다.

“어딜 가려구?”

그의 갑옷은 어느새 원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놀랐나? 어때 재미있지? 이건 마갑이라고 하는 건데, 필요에 따라 모양이 변하게 되지.”

그는 여전히 시끄럽게 주절거렸다.

“너처럼 뭣 모르고 덤벼드는 녀석을 사냥하기에는 아주 좋은 물건이야. 창처럼 빼앗길 염려도 없고....”

그러나 숨도 쉴 수 없는 고통에 지배당하고 있는 일리에에게는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의 지껄이는 소리는 귓가에서 공허하게 스쳐갈 뿐이었다.

‘크윽..., 갈비뼈가 부러진 건가?’

“자, 그러면 잘 가게, 친구.... 성기사단의 정예 기사를 상대로 이 정도까지 싸웠다는 사실만으로도 칭찬해 줄만하니, 깨끗하게 머리통을 부숴주도록 하지.”

그의 갑옷이 또다시 부풀어올랐다. 이번에는 그의 오른팔이 뭉툭한 몽둥이 같이 생긴 커다란 해머로 변해버렸다.

‘틀렸다.’

일리에는 커다란 해머에서 시선을 돌리며 눈을 꼭 감았다.

‘그러고 보니 이것을 전해주기로 했었지.’

허리춤에 차고 있던 물병이 생각났다. 왜 이런 때에 꼬마와의 약속 같은 사소한 것이 떠오르는 지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일리에는 자신의 마지막 생명의 기운을 느끼려 애쓰며 죽음을 기다렸다.

쿠르르르릉-.

갑자기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어엇-!”

일리에와 그 기사는 거의 동시에 비명을 질러댔다. 흔들림은 점차 거세어지며 성난 파도처럼 그들을 뒤덮었고, 마침내 포효하며 산처럼 솟구쳤다. 그들은 한 덩어리로 얽혀 언덕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을 일리에였다. 흔들거리는 뇌를 진정시키며 간신히 눈을 뜨자 기사의 커다란 해머아래 정강이가 끼어있었다. 다행히도 그 기사는 충격에 아직 헤어나지 못한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일리에가 해머에 깔린 다리를 빼보려 하자 뼈마디를 찌르는 듯한 고통이 엄습해왔다.

‘젠장, 다리도 부러져버린 건가?’

일리에가 고통을 참아가며 간신히 다리를 빼내자 그의 눈 앞에 어떤 사내가 서 있었다.

“그 목걸이는 어디서 난 것이냐?”

흙빛의 기괴한 얼굴을 한 남자가 매서운 목소리로 뜬금없는 질문을 내던졌다.


20화 : 시선 1


일리에는 부러진 다리를 움켜쥔 채 기묘한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대답해라. 그 목걸이는 어디서 난 것이냐?”

오래된 시체처럼 거무튀튀한 흙빛 피부가 찌를 듯이 매섭게 노려보는 눈동자의 생기와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또한 양쪽 볼에 그려진 기묘한 문신이 보통 사람과는 어딘가 모르게 이질감이 느껴지는 얼굴과 더해져 기괴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혹시... 아우스터즈입니까?”

“...그렇다. 그보다 내 질문에나 답해라.”

그의 구부린 손바닥이 크게 원을 그리더니 땅을 향했다. 그러자 그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얼어붙은 땅이 석순처럼 날카롭게 솟아올라 일리에의 눈 앞을 가로 막고는 다시 땅속으로 사라졌다.

“어설픈 거짓말이나 늘어놓았다간 곧바로 네 머리통에 바람 구멍을 내버릴 테다…. 대지의 정령 놈의 송곳니는 비열한 자를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일리에는 마른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이것은 그 여자애... 그러니까 여자애가 준 겁니다. 그게....”

꼬마의 이름이 갑자기 생각나지 않았다. 식은 땀이 흐르며 말이 앞 말을 자꾸 디디고 나갔다.

“.......”

그는 그렇지 않아도 매서운 눈꼬리를 치켜 올리며 일리에를 노려보았다.

“그 아우스터즈 여자애 말입니다. 그 애가... 에, 그... 거기 있잖습니까.... 피의 샘물. 예..., 피의 샘물에서 우연히 마주쳤습니다.”

“...라비니아 말인가? 그 애의 목걸이를 빼앗은 건가? 그 애는 지금 어디 있지?”

그는 표정이 더 험악해졌다.

“예... 맞아요. 라비니아.... 아, 아니... 라비니아라는 애는 맞는데, 빼앗은 건 아닙니다. 그 애가 이것을 줬습니다. 제가 아우스터즈 마을로 가고 싶다고 했더니 이것을 주었습니다.”

일리에는 목걸이를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종전까지 기사들과 일대일로 당당하게 싸우던 용자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입가에 비굴한 미소가 어려있었다.

“그 애는 잘 있을 겁니다. 이 기사 놈들 때문에 다리를 건널 수 없어서 저만 먼저 왔습니다.”

그의 시선이 일리에의 목에 고정되더니 바짝 쭈그려 앉아 턱을 들어올렸다.

“너, 물린 거냐?!”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누그러졌다.

“예, 예. 그래서 아우스터즈의 마을을 찾아 여기까지 헤맨 겁니다.”

“멍청한 놈, 진작 그렇게 얘기할 것이지.”

그는 급히 일어서 숲 쪽을 향해 소리쳤다.

“이봐-! 물린 놈이 들어왔다.”

“그래?”

아무도 안보이던 숲에서 목소리가 들리더니 마술처럼 허공에서 또 다른 사내가 나타났다.

“물린 게 언제지?”

“어제 정오쯤입니다. 그리고 오다가 피의 샘물을 마셨고요. 아, 여기 피의 샘물을 떠온 것이 있습니다. 라비니아가 전해주라고 했어요.”

“그랬군.”

그는 일리에가 전해주는 물통을 받아 들었다.

“좋아. 일어설 수 있겠어?”

“어깨에 기대. 자네는 얼른 이 물통을 가지고 가서 카리사스님께 전하고 가는 길에 애들을 몇 명 보내.”

“그래, 알았어.”

그는 일리에를 부축하며 숲 속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푸딩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자 그 안에서는 또 한번의 마법이 연출되었다. 밖에서는 보통의 숲으로 밖에 보이지 않던 자리에서 목조 감시 탑과 토템 기둥이 나타났다. 그는 탑 아래의 기둥 옆에 일리에를 앉혔다.


21화 : 시선 2(최종화)


“고생이 많았겠군.”

“뭐..., 이젠 괜찮습니다.”

“나 역시, 아니 이 마을 사람들 모두 그 고생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 사람들이 올 때까지 잠깐만 기다리게.”

긴장이 풀어지자 아픈 곳이 또다시 쑤셔왔다. 팔다리가 늘어지면서 온몸에서 불덩이 같은 열기가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마을로 들어서는 입구 쪽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무슨 일이야?”

“뱀파이어한테 물린 친구가 찾아왔어. 카리사스님께 좀 데리고 가게. 아, 그리고 자네 둘은 라비니아가 다리 건너편에 있다고 하니까 데리고 오고, 가는 길에 저쪽의 누워있는 기사들을 적당히 치워버려.”

“응? 어디 말하는 거야?”

“어...?”

그는 놀라 그들이 있던 자리로 달려나갔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일으켰던 거대한 언덕의 흔적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이럴 리가 없는데? ...말도 한 마리는 다리가 부러졌었고, 세 놈 중 한 놈은 죽었고 나머지도 기절해 있었는데. 어떻게 순식간에 이런....”

일리에도 그들을 따라 그곳으로 나갔다. 발걸음을 뗄 때마다 근육마디가 비틀비틀 꼬이면서 터져버릴 것 같았다.

“어떤 놈들이었는데?”

“기사였어. 새로 파견된 정부군인 것 같더군. 한 놈은 좀 이상한 갑옷을 입고 있었고. 하지만 보통 인간이었단 말이야.”

“뭐야, 정부군을 건드린 거야? 바보 아냐? 어쩌자고 그런....”

“상관없잖아. 뱀파이어들을 몰아내기는커녕 멍청하게 대책도 없이 먹이 감이나 되려 몰려온 놈들은.... 게다가 어차피 놈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지도 못했을 거야.”

“좋아, 좋아. 그런 건 나중에 얘기하자고.”

“그래, 먼저 저 친구부터 데려다 줘. 부상이 심하니까 조심해서.... 자네들 라비니아한테 가봐. 캘룸 다리 있는 곳에 기사들이 있어서 건너오지 못하고 있대.”

일리에의 머리 속은 피가 빠져나가며 공명이 일어나는 듯 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무척 멀게 느껴졌다. 세상이 한 바퀴 돌더니 땅바닥이 눈 앞을 향해 달려왔다. 몸이 더 이상 중력을 거스르지 못하고 무너져버렸다.

“응? 이 친구 왜이래?”

누군가가 일리에를 붙잡아 흔들며 말했다.

“이봐, 이봐. 괜찮나?”

“안되겠군. 빨리 가세.”

사람들이 시체처럼 늘어진 일리에의 어깨와 다리를 붙잡아 들어올렸다. 그의 머리가 그를 들어 옮기는 사람들의 발걸음에 리듬을 맞춰 흔들거렸다.

일리에는 꿈을 꾸고 있었다. 아니 현실보다 생생한 또 다른 내면의 세계를 헤엄치고 있었다. 피의 샘물 속에 담긴듯한 기묘한 환상이 그의 몸을 뒤덮었다.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서서히 커져가는 고동소리가 천지를 울리며 세상과 공명하고 있었다. 심장에서 뻗어나가는 생명의 줄기가 신경의 말단과 세포 하나하나까지 물결쳤다. 검붉은 세상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심장을 향하였고, 심장은 또 다시 그것으로 전신을 적셨다.

아귀처럼 모든 것을 집어삼키던 심장은 마침내 모든 것을 텅 비워버렸고, 그는 허공을 허우적거리며 부유하였다. 이제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 내면의 우주를 채우려는 듯 그의 육체가 끓어올랐다. 그의 육신은 보다 많은 생명을 원하고 있었다.

‘부족해. 이것만으로는....’

타는 듯한 갈증이 또 다시 그를 괴롭혀왔다.

‘느껴진다.... 멀지 않은 곳. 아니... 아주 가깝다. 작지만..., 아주 작지만. ...필요하다.’

그는 먹이 감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닿지 않는다....’

그는 좀 더 세차게 어둠 속을 휘젓기 시작했다. 차단되었던 외부신경이 다시 희미하게 연결되면서 아득히 멀리서 또 다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떨어져. 피해....”

“죽여버려. 이 녀석 이미...”

크아아아악!

단발마의 비명소리와 함께 일리에는 목 줄기를 타고 넘어오는 뜨거운 생명의 기쁨에 젖어 들었다. 그의 폐는 점점 더 세차게 팽창하면서 빨아들이는 혈류량을 증가시켰다. 다시 태어난 새로운 오감이 그의 신경 줄기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주변이 해질녘처럼 어두웠고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먹이 감에서 흘러 들어오는 선혈과 함께 공포와 증오에 젖은 사람들의 시선까지 삼켜야 했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