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다크에덴/etc.

다크에덴 :: 소설 번외편 "아우스터즈" [1화 ~ 7화]

728x90
반응형

현재로부터 18년 전, 다크에덴에 '아우스터즈' 종족이 추가된 전후로 공개되었던 소설입니다

일반 유저가 작성한 것은 아니였고, 게임사 공식적으로 연재가 되었습니다. 기존의 다크에덴 소설처럼 장편은 아니고 아우스터즈와 관련된 인물들이 일부 등장하는 '단편'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참고로 기존 다크에덴 소설(총 4권)은 프롤로그 부분이 홈페이지에 공개가 되었는데요. 판매부수가 적어서 4권으로 완결이 나기는 했으나, 프롤로그 부분이라도 혹시나 저작권 문제가 있을까 싶어서 올리지는 못하겠습니다(현재도 e북으로 판매중이기 때문에)

찾아보니까 1권은 무료 공개로 전환이 되었더군요. 궁금하시면 '여기'로 가셔서 감상하시길 바랍니다


목차


1화 : 악마들


하늘이 또 다시 붉어지고 있었다.

일그러진 태양이 산등성이 위로 슬그머니 내려앉고 있었고, 두꺼운 대기를 뚫고 살아남은 붉은 빛이 일리에의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비춰 들어왔다.

오랫동안 다듬지 못한 긴 머리카락은 갈갈이 뻗쳐 산발이 되었고, 단정치 못한 수염은 그를 10년은 더 나이 들어 보이게 했다. 보통 때라면 매력적으로 보였을 듯한 커다란 눈은 반도 채 떠지지 않았다. 검붉은 핏자국으로 얼룩진 가죽 갑옷 위에는 가슴만 가려주는 얇은 철갑을 걸치고 있었다. 그 어울리지 않는 넓적한 갑옷은 일리에의 왜소한 체구를 더욱 볼품없이 만들고 있었다.

일리에는 후들거리는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산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움직일 때마다 온 몸이 삐그덕거리며 비명을 질러댔다. 상체를 반쯤 돌렸을 뿐인데도 대뇌가 뇌수 속을 빙글빙글 헤엄치고 있는 것 같았다. 목구멍 아래에서 갑작스레 구역질이 밀려 올라오면서 일리에는 그대로 바닥에 엎드리고 말았다.

“우웩.... 켁 켁 켁....”

내장이 입에서 한꺼번에 쏟아질듯한 구역질을 몇 번이나 씹어 삼킨 후에야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산 아래 저편에는 기괴하게 솟아있는 펠란 성의 성채가 붉은 빛을 받으며 반대편으로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악마들...”

일리에는 입술을 떨며 나지막이 뇌까렸다.

펠란 성 주변에는 왕실의 문장이 새겨진 손수건을 팔에 두른 시체들이 새카맣게 깔려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새벽녘의 추위를 달래기 위해 술병을 돌려 마셨던 전우들도 끼어 있을 것이다. 즐비하게 늘어선 시체들 위로 까마귀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눈알과 내장 속으로 머리를 파묻고서 아직은 미지근한 온기가 남아있는 신선한 먹이를 뜯어먹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무언가 커다란 짐승 같은 것들도 시체 위를 꾸물꾸물 움직이고 있었다. 피를 빨아 삼키는 괴물들이 승전의 만찬을 즐기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다시 한번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았다. 그는 얼른 고개를 돌리며 일어섰다. 태양은 벌써 절반이나 산 아래로 숨어버렸다. 산으로 첩첩이 둘러싸인 이 지방의 겨울은 유난히도 해가 짧았다.

일리에는 부러진 듯한 갈비뼈를 움켜쥐고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옆구리에서 덜렁거리는 장검이 상처를 스칠 때마다 불에 데인 듯 쓰라렸다.

정무대신 라이누스의 영지 중에 하나인 라드키아 지방에 반란군이 일어나자 정부는 긴급히 징집령을 내렸다. 애슬라니아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라이누스의 명령이었으므로 수도 에도니아는 순식간에 각지의 영주들이 보내온 병사들로 가득 찼다. 남서부의 작은 영지에서 소작농을 하던 일리에도 마을의 젊은이들과 함께 정부군으로 편입되었다.

수도 주변의 임시 막사에서 초초하게 출정을 기다리고 있던 일리에는 두 번째 원정대가 출발하고 나자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이미 5만이 넘는 병사들이 출발하였으므로 국경부근의 변두리 지방 하나를 진압하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3차 원정대에 편입된다고 하더라도 상황은 거의 종료되었을 게 틀림없으며, 어쩌면 이대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정부는 3차 원정대를 출정시켰다. 그리고 그 속에는 일리에도 끼어있었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병사들 사이에 1차 원정대는 전멸하였고 2차 원정대도 반 이상의 병력을 잃은 채 추가병력이 합류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일리에는 그런 재수없는 소문을 열심히 떠들고 다니는 동료의 뒷통수를 주먹으로 갈기며 갖은 욕을 퍼부어 주었다.

하지만 이렇게 긴급히 군대를 출정시켰다는 사실이 그를 내심 불안하게 하였다.

때는 초겨울이었지만 바깥 생활을 오래하기에는 좋지 않은 시기였다. 애슬라니아의 가을과 겨울은 여름의 가뭄을 보상해주는 듯한 장마와 폭설의 계절이다. 신발이 마를 틈 없이 오랜 행군이 거듭되자 일리에의 발가락은 동상으로 3개나 터져버렸다. 하지만 라드키아에만 도착하기만 하면 이 수많은 병사들에 압도된 반란군들이 모조리 항복을 하고, 일리에는 두둑이 포상을 받아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6살 때 교회의 높다란 종탑에서 떨어졌을 때도 상처 하나 없이 살아났었다. 잠보리 아저씨네의 사나운 말의 항문에 마른 풀잎으로 불침을 놓다가 뒷발굽에 차인 적도 있었다.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5월 축제 때 또래 친구들끼리 마을에서 제일 예쁜 벨라에게 누가 먼저 파트너 신청을 하느냐를 놓고 제비 뽑기를 했을 때도 일리에는 첫 번째 제비를 뽑았었다. 뭐 결국 제비 뽑기를 하는 사이에 친구 하나 없이 따돌림 당하던 보돌라 녀석이 선수를 치긴 했지만 말이다. 일리에는 늘 스스로 운이 좋다고 생각해왔다.

에도니아에서 라드키아까지는 걸어서 1주일이면 충분히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악천후로 정상적인 이동로를 거칠 수 없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되돌아가야 했던 것도 몇 번인지 모른다. 덕분에 3차 원정대가 라드키아에 도착한 것은 무려 3주가 넘게 지난 후였다.

갖은 고생 끝에 라드키아에 도착한 순간 일리에는 그 불길한 소문이 틀렸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오히려 상황은 그보다 훨씬 안 좋았다. 살아남은 2차 원정대는 반은커녕 3분의 1도 안 되는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그 중 대부분은 반쯤 미쳐있었고,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자도 적지 않았다.

일리에는 그래도 끝까지 자신의 운을 믿었다. 자신만은 다를 거라고.... 적어도 뱀파이어의 짐승 같은 송곳니가 목덜미를 꿰뚫기 전까지는 그랬다


2화 : 갈증 1


일리에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지며 입에서 하얀 입김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장갑을 벗고 이마로 손을 가져갔다. 추위에 잔뜩 곱아있던 손가락 위로 데일 듯이 뜨거운 열기가 전해졌다. 발열의 괴로움뿐만이 아니었다. 온 몸이 후줄근하니 몸살이라도 오른 것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타는 듯한 갈증과 주기적으로 올라오는 구역질이었다.

일리에는 바위 위에 쌓인 눈을 한 움큼 집어 입에 털어 넣었다. 이빨이 너무 시려 그대로 부숴져 버릴 것 같았다. 한 움큼을 녹여봐야 한 모금이나 될까, 그는 시린 이를 악물어가며 몇 번이나 눈덩이를 퍼먹었다. 하지만 목구멍에 모래가 걸려 있는 듯한 지독한 갈증을 해소하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그는 바위 위의 눈을 털어 치워버리고는 그 위에 걸터앉았다. 팔뚝의 상처가 부글거리듯 안쪽에서부터 부풀어올라 있었다. 팔 뿐이 아니었다. 다른 모든 상처들도 마찬가지로 징그럽게 돋아있었다. 문득 동상으로 터져버렸던 발가락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부터 발목 아래로 아무런 감각이 전해지지 않고 있었다.

일리에는 장화 끈을 하나씩 풀어 나갔다. 눈에 젖어 얼어 붙고 피까지 눌러 붙은 장화 끈을 장갑 낀 손으로 푸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았다. 간신히 오른쪽 장화의 끈을 풀어내고서 발을 빼냈다. 피와 고름으로 얼룩진 양말 위에서 찝찝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올랐다. 양말을 벗기는데 발가락이 있는 부분에서는 거의 살 거죽을 벗겨내는 듯했다. 발바닥을 돌려 발가락 부위를 살피던 일리에는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아흐....”

발가락의 상처에서 속살이 터져 나오다 못해 짓눌려 발가락 사이사이에 끼어있었다. 도저히 인간의 발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나마 자신의 상처니까 망정이었지 다른 사람이 이렇게 된 것을 보았다면 훨씬 역겹게 느껴졌을 것 같았다.

“제기랄....”

일리에는 손가락으로 상처를 살짝 눌러보았다. 젤리처럼 말캉거리는 분홍빛 피부에서는 아무런 감촉을 느낄 수 없었다. 차라리 지금이라면 썩어버리기 전에 아무런 고통 없이 발가락을 잘라낼 수 있을 지도 몰랐다. 그는 뭉그러져버린 발가락을 이리 저리 살피며 잠시 갈등했다.

“...관두자. 아우스터즈 마을에 가면 어떻게든 되겠지.”

그는 다시 양말을 신고는 신발 끈을 동여맸다. 해는 이미 산 아래로 숨어버렸고 희미한 잔양만이 길을 밝혀주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해가 지더라도 보름달 빛과 눈이 야행을 도와줄 거라는 사실이었다.

목에 시커먼 두 개의 구멍이 뚫린 것이 한나절 전이었으니 앞으로 18시간 내에 아우스터즈의 마을에 도착해야 했다. 일리에는 오른손으로 아픈 옆구리를 꾸욱 누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가 지금 가고 있는 곳은 무녀 카라사스가 함께 살고 있는 아우스터즈의 마을이다. 그들은 일리에와 마찬가지로 뱀파이어에게 피를 빨렸던 가여운 자들이었다. 뱀파이어에게 희생된 자들은 대개 속절없이 고통에 몸부림치다 피의 노예로 전락하거나 죽음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간혹 생에 대한 의지가 강했던 자들은 뱀파이어로 변하기 전에 인간으로 돌아갈 방법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그 중 유일하게 성공한 예가 무녀 카리사스의 영험한 힘을 빌어 뱀파이어도 인간도 아닌 아우스터즈라는 새로운 종족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일리에도 알지 못했다.


3화 : 갈증 2


일리에가 2차 원정대와 합류했을 때였다.

3차 원정대로 도착한 병사들은 모두 이곳의 상황과 적들에 대해 알고 싶어했다. 하지만 3차 원정대의 진지는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되었고, 상부에서는 두 부대원 사이의 접촉을 일체 금지시켰다. 그러나 이것은 후발대원들의 호기심과 우울한 상상력만을 부추길 뿐이었다.

그러던 중 보급물자를 전해주기 위한 수송마차가 선발대의 진지 안으로 들여보내진 적이 있었다. 그때 일리에도 짐을 나를 일꾼으로 같이 따라갈 수 있었다. 일리에는 선발대원들과의 접촉을 기대했지만, 그들은 멀리 떨어져 있거나 막사에서 대기하고 있어서 이야기를 나눠볼 기회가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그리고 일꾼으로 따라온 모든 병사들은 자리에서 함부로 이탈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당했다.

그러나 일리에는 점심식사 후 화장실에 가다가 나무 뒤에서 쭈그려 앉아있는 병사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주위를 살피며 나지막이 그를 불렀다.

“이봐, 이봐....”

그 병사는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이....”

일리에는 조심스레 그에게로 다가갔다. 나무 뒤에는 얼굴이 흙빛이 된 깡마른 병사가 죽은 듯이 기대고 앉아있었다.

“이봐, 물어볼 게 있는데....”

일리에가 그를 부르며 바로 옆에 섰지만 그 병사는 고개를 숙인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저기....”

일리에는 그의 어깨라도 흔들어볼 요량으로 손을 뻗다가 완전히 무시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다.

“난 3차 원정대로 왔는데, 지금 보급물자를 나르러 여기 들어왔어. ...오늘 저녁은 꽤 근사할 거야. 커다란 양고기 햄이랑 치즈가 창고에 가득가득 들어찼으니까....”

일리에는 그의 관심을 끌만한 내용의 이야기를 꺼내보았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약간 까닥거렸을 뿐 여전히 대화에 뜻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흐음....”

일리에는 말을 멈추고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추수가 끝난 후 썩어 넘어진 허수아비랑 얘기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일리에는 할 수 없이 그에게서 고개를 돌려야 했다. 이런 곳에서 시간을 오래 끌다가 들키면 무슨 문책을 당할 지 모를 일이었다.

“...술 좀 가진 거 있어?”

일리에가 막 포기하려던 순간 미동도 않던 병사의 입에서 드디어 말문이 터져나왔다. 비록 그 내용은 그다지 반갑지는 않은 것이지만 그래도 일리에는 잽싸게 그의 말에 대꾸해주었다.

“브랜디라면 조금....”

“이리 내놔봐.”

일리에는 가슴 안쪽 주머니에서 양철 술병을 주섬주섬 꺼내 그에게 건네줬다. 그는 조금 전까지의 모습은 간데없이 빠른 손놀림으로 술병을 낚아채고는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것을 지켜보던 일리에는 꿀꺽하고 침을 삼켰다.

“...이거 괜찮네. 목이 타는 건 여전하지만.... 항상 따뜻하게 먹으려고 가슴에 넣어두었던 거냐? 행여나 이런 걸로 심장을 보호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거라면 관둬라. 이 딴 걸론 그 놈들한텐 어림도 없지. ...이건 내가 가져가도 되지?”

“아니, 그건....”

그는 일리에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벌써 술병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래..., 맛 좋은 술과 만찬을 즐긴 후라도 좋겠지.”

그리고는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지껄였다.

“알고 싶은 게 뭐야? 미리 말해두지만 여기서는 국경 못 빠져나가. 그 망할 놈들의....”

“아니 그게 아니라....”

일리에는 현재 이곳 상황이 어떠한지, 상대가 어떤 놈들인지 등을 물었다. 절반도 넘게 남아있던 브랜디를 병째 빼앗긴 건 무척 아까웠지만, 정보만 충분히 얻어가면 다른 동료들한테 이야기의 대가로 술 한 병 뜯어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얘기해줘도 보기 전까지는 못 믿겠지만 그 놈들은 악마야. 괴물... 피를 마시는 괴물.”

그는 뱀파이어와 싸웠던 무용담을 천천히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제법 길어지자 일리에는 조금 초조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믿을 수 없는 그의 이야기에서 점점 빠져들게 되면서 도저히 귀를 뗄 수가 없었다.


4화 : 갈증 3


2차 원정대의 병사들은 그들을 처음 보았을 때 웃음바다를 이루었다.

백지장처럼 하얀 도련님이 나풀거리는 귀족의상을 입고 나들이를 나오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채 이렇다 할만한 진형도 없이 전장의 한가운데로 유유자적하게 걸어 나왔다.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를 띄운 채 느긋하고 즐거워 보이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개중에는 담소를 나누며 걷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마치 펠란 성이랑 학교에서 하교하는 학생들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어이가 없어진 병사들은 차츰 비웃음소리도 수그러들었다. 그저 고작 이런 놈들을 상대하러 고생하며 먼 길을 걸어 이 곳까지 왔다는 사실이 화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최전방에 서있다 까불거리며 뛰쳐나간 병사 하나가 순식간에 미이라로 변하자 상황은 돌변하였다.

피를 먹는 악마들. 병사들의 날카로운 칼과 창은 그들의 피부에 긁힌 상처를 입히는 정도가 고작이었고, 설사 상처가 난다 언제 그랬냐는 듯 씻은 듯이 아물어버렸다. 그들은 겁에 질린 병사들의 사지를 날카로운 손톱으로 뜯어내고 허우적거리는 팔다리를 움켜쥔 채 목에 이빨을 꽂아 피를 빨았다. 손톱에서 뿜어 나오는 기묘한 액체에는 병사들의 두꺼운 갑옷도 여지없이 녹아버렸다. 줄행랑을 놓던 병사들도 그들이 치는 검은 안개 속에서 모든 감각을 차단당한 채 속절없이 사냥감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당황해서 도망치는 병사들 사이에서도 미친 듯이 칼을 휘둘렀다. 용기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자신의 칼이 귀찮게 여겨진다면 보다 사냥하기 편리한 다른 동료들을 노릴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옆에 서 있던 병사가 붙잡혀 목을 물어 뜯겼다. 전쟁의 굉음 속에서도 피를 빨리는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 병사는 피를 빨리며 불거져 나온 두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던 것인지, 구해달라는 애원의 눈빛이었는지 달아나는 그의 뇌리에는 그 눈동자가 각인된 듯 사라지지 않았다.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자는 알지 못한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비명소리, 무기와 무기가 부딪히는 소리 속에서 어느 방향에서 날아올지 모르는 죽음의 그림자에 대한 공포는 서서히 극에 달하게 된다. 시야는 점점 좁아지고 마침내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된다. 무조건 잡히는 대로 휘두르고 본다. 설사 자신이 휘두른 칼이 동료의 내장을 쏟게 만든다 해도 말이다.

죽음으로 향하는 절규 속에서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는 선혈의 대양 위에 서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더 무서운 사실은 그 놈들한테 물렸을 때 자칫 그들처럼 뱀파이어로 변하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지.”

그것은 어린 시절 잠들기 전 할머니한테서 들었던 흡혈귀 이야기와 같았다. 그때는 너무나 무서워 화장실에도 못 가고 그대로 잠들어야 했다. 결국 한 침대에서 누워 자던 온 가족의 바지를 축축하게 만들어 벼렸지만, 머리가 굵어지면서부터는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미친 놈.... 술병이나 내놔.”

일리에의 얼굴이 붉어진 채 노기를 띠었다. 그리고 그 병사의 주머니에서 술병을 되찾으려고 덤벼들었다. 잠시라도 그런 놈의 말을 진지하게 들었던 자신이 바보스럽게 여겨졌다. 자신이 시골 농사꾼출신이라고 얕잡아 보여졌다고 생각했다.

“잠깐, 잠깐, 잠깐....”

그는 상의의 칼라를 젖히며 목을 드러내 보였다.

“여기 보여? 조그마한 두 개의 이빨자국이...?”

그에게 덤벼들던 일리에는 몸을 잠시 주춤거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가 내밀고 있는 목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말대로 조그마한 점 두 개가 나란히 박혀있었다.

“이거... 진짜야? 그냥 점 같은데....”

“그렇지. 아주 살짝 물린 거니까.... 한달 가까이 멀쩡했었어. 원래 하루 정도 지나면 괴물로 변하거나 죽어버리니까 괜찮은 줄 알았지. 카하하하하.... 그런데 몸이 아주 조금씩 이상해지더라고.... 얼마나 괴로운지는 말로 해도 모를 거야. 앞으로 점점 더 심해지겠지.”

그는 기묘한 미소를 띄우며 말을 이었다.

“.......”

일리에는 자기도 모르게 그에게서 조금 물러섰다.

“...만약에 뱀파이어한테 물리게 되면 펠란성 남서쪽에 있는 마그베다 숲으로 가. 거기에 가면 카라사스라는 무녀가 있지. 이 지방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어. 제시간 안에 도착만 하면 적어도 목숨은 구할 수 있을 거야.”

“...그러는 넌 왜 안가는 거야?”

“괴물 같기는 그 놈들도 마찬가지니까.... 만나보면 알게 될 거야.”

그의 말라붙은 흙빛의 입술은 여전히 한쪽 꼬리를 치켜 올린 채 미소 짓고 있었다.


5화 : 족쇄 1


진지로 돌아가는 병사들은 지친 몸을 서로 마주 기대며 덜컹거리는 수송마차의 리듬에 맞춰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고된 하루 일과를 위로라도 하는 듯 황혼의 노르스름한 빛이 그들의 끄덕거리는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그러나 일리에는 마주 앉아있던 병사의 너덜거리는 신발 밑창을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다. 남아있던 그 많은 짐들을 어떻게 다 날랐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일리에의 머리 속에서는 오로지 그 병사의 말들이 가지에 가지를 쳐나가며 끊임없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막사로 복귀한 뒤에도 일리에는 여전히 멍하니 구석에 틀어박혀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런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저 공격 개시일이 가까워오자 일리에 녀석의 겁쟁이 병이 또 도진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결국 그는 동료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3차 원정대의 펠란 성을 향한 첫 공격 일이 하루 후로 다가왔다. 불안에 견디다 못한 일리에는 소대장 키부에게 찾아가 면회를 요청하였다.

개인 막사 옆에 깔아둔 풀 짚 위에서 키부 소대장은 말라비틀어진 빵 껍질을 부지런히 뜯어 입 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일리에가 그의 앞으로 다가가자 그는 무슨 일이냐는 듯 한쪽 눈을 치켜 떴다.

일리에는 하는 일이라고는 거들먹거리는 것이 고작인 뚱보를 찾아오는 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다 똑똑하고 이 중대한 사안을 처리할 수 있는 높은 사람이랑 대화를 시도했어야 했다. 일리에가 머뭇거리며 아무 말도 않고 있자 키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뭣 때문에 찾아온 거야? 그렇게 가만히 서있지만 말고 얘기를 해봐.”

그의 휑하니 벗겨져가는 널찍한 이마에 깊은 골이 새겨졌다.

“저, 그게.... 얼마 전에요. 제가 2차 원정대 진지에 식량 보급 때문에 들어갔었거든요. 그런데 그때….”

일리에는 머뭇거리며 간신히 입을 열어 나갔다. 그리고 일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모조리 키부에게 늘어놓았다. 물론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이야기의 출처에 대해서는 그 병사가 먼저 일리에에게 말을 걸어 어쩔 수 없이 우연히 듣게 된 이야기라고 열심히 설명하였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뱀파이어 이야기만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그대로 전달하였다. 키부는 여전히 빵 껍질을 씹어대며 그의 말을 묵묵히 들어주었다.

“흠.... 아무래도 내가 간단히 처리할 수준의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여기서 잠깐 기다려봐.”

그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키부는 바닥에서 엉덩이를 무겁게 떼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행여나 일리에가 손대기라도 할까 걱정되는지 빵 껍질이 든 자루를 막사 안으로 던져 넣었다. 그는 빵 가루가 붙은 입술을 훔치며 육중한 몸을 이끌고 천천히 장교 막사 쪽으로 걸어갔다.

일리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키부에게 이야기한 것이 그리 나쁜 선택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멍청한 뚱보 대머리치고는 자신의 말을 꽤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아니 어쩌면 워낙 멍청한 녀석이라 곧이곧대로 그의 말을 모두 믿을 수 있었는지도 몰랐다. 뭐 그보다 앞으로 그가 자기 말을 그대로 잘 전달할 것인지가 문제였다.

이제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3차 원정대의 장교들도 이 사실을 듣고 나면, 선발대의 멍청이들처럼 그렇게 무작정 진격을 명령하지는 않을 것이다. 일단은 진격은 포기하고 다른 방도를 모색해볼 것이다. 그들도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일반적인 병사들과 무기로는 도저히 대적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뱀파이어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과장되게 늘어놓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리에는 키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나름대로 앞으로의 진행을 그렇게 머리 속에 늘어놓아 보았다. 그러나 잠시 후 키부가 다른 병사들을 이끌고 돌아오자 그러한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에게 찾아온 것은 그의 다리를 짓누르는 차디찬 족쇄와 다리 하나 뻗을 공간이 없는 시커먼 구덩이뿐이었다.


6화 : 족쇄 2


진지 한쪽 켠의 울타리 옆에 만들어진 임시 감옥은 실로 비참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이는 무릎 높이보다 약간 높게 파인 자그마한 구덩이로 사람 하나가 간신히 쪼그리고 앉아있을 수 있을 뿐이었다. 천정에 가로세로로 단단하게 쳐있는 나무 창살은 죄수의 머리가 감히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드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또한 땅속 깊숙이 박혀있는 커다란 쇠말뚝은 발목을 차갑게 짓누르는 시커먼 족쇄를 사슬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일리에가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어머니의 자궁 속에 들어있는 아기처럼 웅크리고 앉아 저린 몸뚱어리를 꼼지락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자궁처럼 포근하고 따스한 안식처는 결코 아니었다. 얼어붙은 땅 밑에서 올라오는 차가운 기운은 스믈스믈 뼈 속 깊숙이 파고들었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무작정 끌려와 갇힌 일리에에게 겨울 밤은 혹독한 시련이었다. 새벽녘이 가까워올수록 깊어만 가는 지독한 추위에 일리에는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끊임없이 흔들어 깨워야 했다.

일리에는 시린 발가락을 얇게 한 겹이나 깔렸을까 싶은 밀짚아래로 밀어 넣었다. 밀짚아래에는 좀 전에 그가 몸을 옆으로 기울여 간신히 누어둔 오줌이 식어 바닥을 홍건이 적시고 있었다.

일리에를 끌고 온 병사들은 그에게 스스로 이 임시 감옥을 파게 하였다. 일리에는 구덩이를 최대한 넓게 파려고 노력했지만, 자루 끝이 대각선으로 쪼개져 나가버린 곡괭이로 얼어붙은 땅덩어리를 깨는 건 말처럼 쉽지 않았다. 그리고 간신히 사람 하나가 웅크리고 앉을 만한 구덩이가 파여 지자 그들은 일리에의 손에서 냉정하게 삽과 곡괭이를 빼앗아갔다.

일전에 탈영을 기도했던 몇몇의 병사들도 이 근처에 갇혀있었다. 일리에의 발목에 족쇄를 채우던 병사의 말로는 얼마 전까지 이 자리를 차지했던 주인들이 며칠 전의 갑작스런 한파에 못 견디고 동태가 되어 죽어버렸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아홉 개의 구멍에서 쏟아진 분비물들이 뒤엉켜 덕지덕지 얼어붙어는 바람에 얼마나 지저분했는지 모른다며 낄낄거렸다. 다른 병사는 이 감옥이 유사시엔 흙을 가져와 덮기만 하면 그대로 무덤이 되니 아주 편리하지 않느냐며 시답잖은 농담으로 동의를 구하였다.

억겁의 세월처럼 길게만 느껴지던 지옥 같은 밤이 지나갔다. 새벽 동이 트면서 중앙 막사가 있는 저편에서 진군을 위한 집합명령에 쓰이는 나팔소리가 들려왔다. 바쁘게 뛰어다니는 병사들의 발자국 소리와 갑옷이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이곳까지 들려왔다.

“풋.... 멍청한 자식들.”

일리에는 이젠 반대로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은 어리석은 녀석들의 지옥이 이제부터 시작될 거라는 생각이 들자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망할 놈들..., 모조리 그 괴물 덩어리들의 이빨에 물려 뜯겨버려라. 특히 그 키부 녀석.... 내 말을 듣지 않은 걸 땅을 치며 후회하겠지. 뭐 아무리 놈들이 멍청하다 해도 2차 원정대 애들만큼은 살아서 돌아올 테고 그럼 아마 나한테 미안해하면서 그 놈들 이야기를 더 들려달라고 졸라댈 거야. 그럼 일단 그 키부 녀석들이랑 아까 그 땅을 파게 시켰던 놈들부터 이 감옥에 가두라고 해야지. 그리고 감옥위로 오줌을 누어주어야겠다. 아니, 아니, 아니지.... 아예 거기를 화장실로 쓰는 게 더 좋겠네. 크큿..., 물론 녀석들이 살아서 돌아왔을 때 얘기긴 하지만 말야. 그리고 내가 분명히 놈들에 대해 미리 보고했다는 사실을 알면 높은 분들도 내 말을 귀담아 들어줄 거야. 그러면 그때는 정말 놈들이 일반적인 병사들과 무기로는 도저히 대적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걸 확실하게 얘기해야지. 그리고 수도로 돌아가 다시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하면 잘하면 진급이고, 못해도 이 악마 같은 놈들이 득실거리는 곳에서는 벗어날 수 있겠지....’

머리 속에 즐거운 상상의 꼬리가 이어져가자 그는 몸이 저린 것도 춥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일리에는 왠지 안심이 되었다는 듯 서서히 머리위로 솟아오르는 햇빛을 따스하게 받아가며 진군하는 병사들의 군악소리를 자장가 삼아 스르르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7화 : 족쇄 3


막사 쪽 저편에서 갑작스러운 고함과 비명소리가 꿈결 속을 헤매고 있던 일리에의 귓전을 세차게 흔들어놓았다. 일리에는 무겁게 감겨있던 눈꺼풀을 살짝 깨워내고는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것은 진지를 지키고 있던 병사들의 장난치는 소리였는지 아니면 잠결에 들린 환청이었는지 밖은 그저 조용하기만 했다. 일리에는 몸을 약간 비틀어 누이며 다시 잠을 청하고자 눈을 감았다.

“이봐, 그 쪽이다!!”

이번에 터져 나온 고함소리는 매우 가까운 곳이었다.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와 비상사태를 알리는 종소리마저 섞여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일리에는 고개를 들어 밖을 내다보고 싶었지만 머리 위를 짓누르고 있는 나무창살이 이를 철저하게 가로막았다. 그저 밖에서 들려오는 정보들만으로 상황을 유추해야 했다. 그 소리들은 이따금 아주 가까이서도 들렸지만 대개의 경우 다른 소음과 함께 섞여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특히 찢어져라 시끄럽게 울려대고 있는 비상 종소리는 참기 힘들 정도로 거슬렸다.

“이런 멍청한 자식! 내가 그 쪽.... 죽고 싶어....”

“한 놈 잡....”

“겁...지마. ...대는 ...다!”

단편적으로 들려오는 불길한 단어들이 맞추다 만 퍼즐조각처럼 서서히 윤곽을 찾아가고 있었다.

‘설마.... 뱀파이어들이 본대를 모두 처리하고 이곳까지 쓸어버리러 온 건가?’

“이봐 밖에 누구 없어? 무슨 일이야?”

일리에는 약간 겁에 질린 채 소리쳤다. 하지만 그에 대꾸하는 소리들은 그를 점점 불안케 하기만 하는 지독한 소음들뿐이었다.

“나 좀 꺼내줘. 이봐....”

일리에는 고개를 비틀어 최대한 밖을 향하도록 하며 소리쳤다.

“누구 있으면 좀 이쪽으로 와봐. 아무도 없는 거야?”

갑작스레 사람의 그림자 같은 것이 머리 위를 덮치며, 신발 끝으로 생각되는 물건이 일리에의 시야에 살짝 들어왔다.

“어이, 누군진 몰라도 나 좀 꺼내줘. 난 탈영 같은 거 하다가 잡힌 게 아냐. 놈들이 쳐들어 온 거지? 난 놈들에 대해 보고했는데 멍청한 길카 소대장이 여기에 가둔 거라구. 그러니까...”

일리에는 자신이 이 안에 갇히게 된 사정을 두서없이 애타게 늘어놓았다. 퍼벅, 퍽, 퍽.... 하지만 더 이상의 설명도 필요 없다는 듯이 도끼로 나무창살을 부수고 있는 것 같은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으앗.... 고마워. 고맙긴 한데 저..., 조금만 살살해 줄 수 없을까. 너무..., 아윽....”

나무 파편이 세차게 튀며 쏟아져 내리자 일리에는 머리를 감싸며 최대한 웅크렸다. 이대로라면 묵직한 도끼 날이 창살을 뚫고 머리위로 꽂혀 내릴 것만 같았다. 그러고 보니 한쪽 구석에 한눈에 보기에도 딱딱해질 대로 딱딱해진 호밀 빵 반 덩어리와 작은 물그릇이 놓여 있었다. 물 그릇 위로도 나무 조각들이 떨어지면서 작은 파문을 형성했다.

퍼석석!!

마침내 굉음과 함께 나무 창살이 완전히 부숴져 내렸다. 잔뜩 웅크리고 있던 일리에는 살며시 눈을 뜨며 고개를 들었다. 나무 창살에는 간신히 어깨를 뺄 수 있을 만큼 구멍이 뚫려 있었다. 일리에는 덜렁거리는 창살들을 밀어내며 머리와 한쪽 팔을 끄집어냈다. 그리고 조심스레 상체를 일으켜 자신을 꺼내준 이를 올려다보았다.

“아, 정말 고마워. 근데....”

일리에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 이는 이제 막 변성기가 지났을까 싶은 어린 소년이었다. 소년이 입고 있는 코트에는 금실로 수 놓인 기묘한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그 말쑥하게 차려 입은 도련님의 얼굴은 눈보다 하얬고, 깔끔하게 빗어 넘긴 블론즈의 머리카락은 인형 같은 얼굴에 잘 어울렸다.

“...넌 누구냐?”

피 비린내 나는 전쟁터와는 이질감밖에 느껴지지 않는 그 소년은 아무 대답도 없이 가만히 그를 쳐다만 볼 뿐이었다.

“혹시 니가 날 구해준 거냐?”

그 소년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고 잔잔한 나무 조각들이 몇 개 소매에 붙어있었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머리 속을 스쳤다.

“너 혹시....”

말이 미처 다 끝나기도 전에 그는 손끝에 달린 무언가로 일리에의 가슴팍을 세차게 긁어냈다.

“그억...!”

일리에는 갑작스런 충격에 뒤로 꺾여버린 허리를 추스르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무표정했던 소년의 얼굴에 희색이 돌면서 그는 손가락을 묻은 생혈을 가볍게 핥아먹었다. 그의 손끝에는 어느 틈에 맹수처럼 날카로운 손톱이 10센티는 돋아있었다. 그는 다시 한번 손톱을 커다랗게 휘둘렀고 일리에는 놀라 팔로 얼굴을 감쌌다. 소년의 손톱은 일리에의 팔꿈치를 깊숙이 파고들었고, 날카로운 낫이 뼈를 긁어대는 듯한 기분 나쁜 감각이 전해져 왔다.

공포감에 휩싸인 일리에에게 고통은 거의 전해지지 않았다. 그저 팔뚝이 제대로 붙어있는지 저놈이 또 언제 팔을 휘두를 지가 그의 머리 속을 가득 매웠다. 그 소년은 어린 아이들이 붙잡은 벌레를 괴롭히며 장난치듯 일리에를 가지고 노는 것 같았다.

소년이 미소 지을 때마다 일리에의 몸에는 상처가 하나 둘씩 늘어갔고 점점 더 깊은 공포가 그의 기도를 틀어막았다. 일리에는 조금씩 조금씩 구덩이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그러자 소년은 일리에의 머리채를 휘어잡고는 다시 위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머리를 세차게 뒤로 끌어당겼다.

일리에의 먹음직스러운 목덜미가 소름 끼치게 미소 짓고 있는 소년의 눈 앞에 달콤하게 드러났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