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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에덴/etc.

다크에덴 :: 소설 번외편 "아우스터즈" [8화 ~ 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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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작성하면서 오래간만에 다시 읽어보는데, 추억이네요

소설을 읽던 당시에는 순수하던 초등학생이었는데, 이제는 아재가 되어버렸으니...


목차


8화 : 생명 1


거대한 산들이 흩내린 짙은 어둠은 일리에의 지친 다리를 끊임없이 무겁게 짓눌렀다. 어둠이 집어 삼킨 가파른 산길은 한걸음 한걸음이 거친 파면 위를 걷는 것처럼 위태로웠고, 일리에의 코끝에서 스며드는 차가운 산바람은 폐 속을 깊숙이 찌르며 얇디 얇은 모세혈관을 하나하나 터트려갔다.

몇 시간째 계속되고 있는 지독한 갈증이 목구멍을 거칠게 휘저으면서 단단하게 굳어버린 혀 끝이 그 속으로 말려들어갈 것만 같았다.

일리에는 잠시 발길을 멈추고 유난히 새하얗게 느껴지는 달빛을 돌아다보았다. 눈빛보다도 창백한 달은 대지의 생명을 떠나는 영혼들을 기다리는 죽음의 나라처럼 차가웠다. 그것은 망자의 곁을 떠도는 사신처럼 일리에의 머리 위에서 고요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물이다.

달빛이 뿜고 있던 마력에 취해있던 일리에에게 어디선가 맑게 샘솟는 샘물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고개를 빼 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샘물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몇 발짝을 움직여 살펴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샘물 소리는 점점 또렷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소리만으로도 갈증과 피로에 지친 그의 몸을 촉촉히 적셔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내 소리뿐만 아니라 그 청아한 샘물의 냄새, 맛, 감촉, 이미지까지 하나하나 생생하게 그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 어째서 그런 것이 느껴지는지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이쪽이다.

일리에는 지금까지의 피로도 완전히 잊고 샘물이 느껴지는 방향을 향해 내달렸다. 얼어 붙은 눈길에 미끄러지고, 땅속에서 솟아오른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고, 나뭇가지와 덤불이 팔다리를 긁어댔지만 그런 것은 개의치 않았다. 좀 전까지만 해도 숨이 턱밑까지 차 올랐던 사실조차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렇게 한 시간을 달리고 나서야 일리에는 오감이 쫓고 있던 샘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말갛게 솟아오르는 샘물은 하늘거리는 기포와 함께 고요히 숨을 쉬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어붙어 있어야 정상일 혹한의 깊은 산속에서 샘물은 연못의 가장자리를 향해 끊임없이 파문을 일으키며 얼어붙은 땅을 녹여가고 있었다.

일리에가 샘물을 느끼고 달려온 거리는 어림잡아도 10키로는 넘을 듯 했다. 아무리 산길을 내달렸다고 해도 이정도 거리 밖의 샘물이 느껴졌다는 것은 확실히 기묘한 일이었다. 극한상황에서의 발휘된다는 초인적인 힘이라는 것인지 아니면 미지의 무언가가 그를 이곳까지 잡아 이끈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일리에의 머리 속에는 그러한 의문들을 정리해갈 이성 따윈 남아있지 않았다. 단지 목마름을 해소하고자 하는 본능만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두 손 가득 샘물을 떠 올렸다. 손바닥에 찰랑 이는 따스한 물결은 어머니의 젓 줄처럼 그의 몸을 포근하게 감쌌다. 일리에는 두 손을 입가에 가져가 축복 받은 생명을 목구멍 아래로 떠 넘겼다. 그 생명의 입자들은 온 몸의 세포를 일시에 깨워 적시며 온몸의 말단으로 번져갔다.

몇 번이나 샘물을 떠 마시던 일리에는 이내 그 속으로 머리를 처박고 들이키기 시작했다. 이미 몇 리터나 되는 물을 마셔댄 것 같았는데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샘물은 끊임없이 목구멍 속을 타고 들어갔다. 그는 순식간에 갑옷과 무기를 벗고는 아예 샘물 속으로 몸을 던졌다. 어머니의 품 속으로 뛰어들 듯 몸을 떨어뜨리자 샘의 바닥 깊숙한 곳까지 서서히 가라 앉았다. 숨결보다 따스한 심연의 말단은 젊은 여인네의 젖가슴처럼 그의 몸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고, 그는 다시 서서히 샘물의 표면위로 부유하기 시작했다. 그는 무엇보다 밝게 남쪽하늘에서 빛나고 있는 시리우스를 바라보며 오랫동안 잊고 있어야 했던 평온과 행복을 마음껏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어울리지 않는 행복은 그리 오래갈 수 없었다. 일리에의 성역을 침범하는 기묘한 생명체가 어둠만큼이나 고요했던 숲 속의 적막을 깨트리며 그의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9화 : 생명 2


일리에의 예민하게 달아오른 감각이 조심스레 샘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움직임을 포착해내었다.

샘물 위에 떠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그는 천천히 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둠이 깊게 내린 숲 속에서 어린아이의 형상을 한 그 그림자는 무언가 겁을 내는 듯이 걸음 걸음마다 무게를 실으며 샘가로 다가왔다. 그 어린아이는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살피고는 옆구리에 차고 있던 가죽 주머니를 꺼내 주둥이를 샘 속에 담가 넣었다. 일리에는 어느 틈에 소리도 없이 몸을 물 속으로 숨기고 눈만 살짝 내밀어 그 작은 침입자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물을 충분히 채워 넣은 그 아이는 뚜껑을 닫고는 물병을 소중히 두 손으로 쥐어 감쌌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 발길을 돌리려던 그 아이는 일리에가 벗어 던져둔 갑옷과 옷가지를 발견하였다. 그 아이는 다시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달빛을 등지고 물속에 숨어있는 일리에를 발견하지는 못하였다.

그 아이는 일리에의 갑옷을 집어 들어 이리저리 살폈다. 이미 물 주머니 같은 것은 까맣게 잊은 듯 하였다. 갑옷을 툭툭 두들겨보기도 하던 그는 그 아래 숨어있던 장검에 이내 시선을 빼앗겼다. 그 아이는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 녀석!!!”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던 일리에는 벼락같이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갔다. 일리에의 포효하는 듯한 고함소리에 얼어붙은 그 아이는 움츠러들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일리에는 잽싸게 칼을 집어 들고는 다른 한 손으로 그 아이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넌 뭐냐...?”

일리에는 칼을 쥔 손을 들어 얼굴에 흘러내리는 물을 훔쳐내며 말을 이었다.

“마을에서 올라온 거냐?”

그 아이는 여전히 겁에 질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일리에는 순간 그 아이의 얼굴이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묘하게 일그러진 눈코입은 거무튀튀한 것이 꼭 썩어 문드러진 송장을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 나와봐.”

일리에는 달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그 아이의 얼굴을 밖으로 끄집어 내었다. 흰자위가 보이지 않는 동그란 눈동자에 코는 나병환자처럼 썩어 떨어진 것 같았다. 피부는 두꺼비 등껍질처럼 칙칙하니 거칠었고 머리는 노인네의 그것처럼 한 올도 없이 벗겨져 있었다. 그리고 얼굴은 마치 가면이라도 쓴 것처럼 굵은 주름이 잡힌 두꺼운 가죽으로 덮여있었다.

흠칫 놀란 일리에는 칼을 옆에 던져 놓았다. 그리고 그 아이의 두 볼을 억세게 쥐어 눌렀다. 혹시 뱀파이어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앞니가 빠져있기는 하였지만 송곳니는 보통 사람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일리에는 그 아이가 측은하게 생각되었다. 전쟁으로 집에 불이나 지독한 화상을 입기라도 한 것 같았다.

일리에는 세게 쥐고 있던 멱살을 살짝 늦춰주며 말했다.

“그 얼굴은 어쩌다가....”

하지만 그 아이는 일리에의 손에서 힘이 조금 빠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발버둥을 치며 달아나려 했다. 엉덩이를 주욱 빼고는 펄쩍 거리며 손가락을 펴려 애쓰다 팔을 때리고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일리에는 몸이 휘청거리며 그 아이에게로 딸려갈 것 같았다. 도저히 예닐곱 살의 힘이라고 믿겨지지 않았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날뛰기 시작하자 일리에는 그 아이의 허리를 잡아 눌러 바닥에 엎드리게 하였다. 그리고 손으로 머리를 잡아 누르며 그 녀석을 깔고 앉았다.

“이봐, 널 해치려는 게 아니야. 난 정부군의 정예병사다.”

일리에는 이 말을 하면서 자신이 감옥에 갇혔다가 탈주한 병사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물론 특별한 상황하였기는 하였지만 자신의 소속이 불분명한 것은 사실이었다.

“가만 있으라니까! 그냥 몇 가지만 물어볼 거야. 알아듣겠어?”

그러나 그 아이는 여전히 몸을 흔들어대며 빠져 나오려고 애썼다.

“젠장, 망할 자식. 가만히 좀 있어봐. ...너 혹시 아우스터즈라고 알고 있냐?”

그 말에 아이는 버둥거리던 몸을 멈추었다.

“너 알고 있구나. 그렇지?”

아이는 잠시 망설이는 듯 하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10화 : 조우 1


“도망치지 않고 몇 가지 내가 묻는 것에 대답해준다고 약속하면 놓아줄게. 알겠지?”

그 아이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고개만 끄덕거리지 말고 대답해. 알겠냐고....”

일리에는 거칠게 되물었다.

“...예.”

그 아이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간신히 입을 열어 겁먹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리에는 일어서서 깔고 앉았던 그 아이의 몸을 일으켜 주었다. 그리고 도망치지 못하게 한 쪽 손을 붙잡고 몸에 묻은 흙은 털어주었다.

“좋아. 꼬마야, 이름이 뭐지?”

“...라비니아.”

그 아이도 같이 흙을 털며 대답했다.

“뭐? 여자아이였구나. 이런..., 밤이라 어두워 실례를 하고 말았군.”

일리에는 그 아이의 흉측해진 얼굴이 더욱더 가엽게 여겨졌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쪼그려 앉아 묻기 시작했다.

“그래, 라비니아. 좋아. 난 지금 아우스터즈의 마을로 가야 해. 아주 아주 급해. 시간이 없거든. 그래서 말인데 혹시 그곳이 어디에 있는지 아니?”

“.......”

그 아이는 또다시 입을 닫았다. 일리에는 그의 손을 세차게 흔들며 다시 말했다.

“라비니아, 대답해준다고 약속했잖아. 약속을 어기는 건 나쁜 짓이야.”

“...목.”

라비니아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알 수 없는 말을 꺼냈다.

“뭐?”

그는 검지손가락을 펴 일리에의 목을 가리키며 말했다.

“목.”

일리에는 고개를 숙여 아이가 가리키는 곳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뱀파이어에게 물린 이빨자국을 말하는 것 같았다.

“아, ...그래. 난 지금 뱀파이어한테 물렸어. 그래서 빨리 아우스터즈 마을로 가야 하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이대로라면 난 죽어버릴 지도 몰라.”

일리에는 그 아이가 겁먹지 않도록 말투를 조심스럽게 바꾸며 그 아이를 설득했다. 자신이 뱀파이어로 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곧바로 도망가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무슨 말인지는 나도 알아요. 나도 아우스터즈니까.”

“뭐?” 일리에는 어안이 벙벙해져 되물었다. “아우스터즈를 한번도 못 봤었어요? 흠..., 아무튼 일단 같이 마을로 가요. 저도 마을로 돌아가야 하니까요.”

얼굴이 이상한 것도 그 괴력도 모두 이 아이가 아우스터즈이기 때문이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응.... 그래. 헌데 혹시 그럼... 아우스터즈는 다 그렇게 생긴 거냐?”

미안한 질문이기는 하였지만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예? 아, 얼굴이요? 당연히 사람마다 다 다르게 생겼죠.”

“아니 그러니까.... 응..., 그런 식으로 인간이랑 다르게 생겼냐는 거지?”

“인간이랑은 좀 다른 것 같아요.”

일리에는 그제서야 예전에 만났던 2차 원정대의 병사가 했던 말이 이해가 되었다. 뱀파이어처럼 인간의 피를 빨며 사는 악마는 아니었지만 그 모습은 괴물과 다름이 없었다. 오히려 외형에 있어서는 오히려 인간보다도 아름다운 뱀파이어 쪽이 훨씬 나았다. 허나 그들의 마음만은 인간에 가까운 것 같았다. 온 몸에 힘이 빠지며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어쨌거나 자신이 인간으로 돌아갈 방법은 없었다. 이대로 죽어버리거나 아니면 뱀파이어로 변해 평생 인간의 목을 물어뜯으며 살아야 한다. 허나 아우스터즈가 되면 인간의 마음만은 잃지 않은 채 괴물 같은 모습으로 살게 된다. 어느 쪽이건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지는 못한다. 평생을 아우스터즈의 마을에서 보내거나, 뱀파이어가 되거나, 죽는 방법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저씨..., 가요. 시간이 너무 지나면 흡혈귀가 되어버려요.”

그 아이는 일리에의 옷을 집어 건네주었다.

“...그래.”

그는 물기를 털어내며 그 아이가 챙겨주는 옷을 주섬주섬 집어 입었다. 하지만 이 아이를 따라가야 할 지 어떨지 판단은 서지 않았다. 옷과 칼을 모두 챙기고 나자 그 아이는 일리에의 손을 잡아 끌었다.

“가요.”

일리에는 그 아이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주변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멍하니 그 아이를 따라 걷다 몇 번이나 발을 헛딛어 넘어질 뻔 하였다.

“괜찮아요?”

“아....”

“나는 여기에 샘물을 뜨러 왔어요. 뱀파이어한테 물린 사람들을 치료할 약의 재료가 되거든요. 어제 있던 전쟁으로 아저씨 같은 사람들이 많이 들어오는 바람에 약이 부족해졌대요. 어른들은 거의.... 어, 어라? 내 물통....”

라비니아는 깜짝 놀라 허리춤을 내려다보았다.

“물통이라면 아까 놓고 온 것 같은데....”

일리에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잠깐만요. 금방 가서 가지고 올게요. 여기서 기다리세요.”

일리에는 샘가를 향해 뛰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자리에 주저 앉았다. 아직도 저 아이를 따라 아우스터즈의 마을로 가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게다가 다른 병사들도 그곳에 왔다면 아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동료들이라도 있다면 조금 위안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쩌면 키부 자식도 뱀파이어한테 물리고 그 곳으로 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휴....”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으아아아앗-, 아저씨!!!”

그때 어둠 속에서 잠들어있던 숲을 뒤흔들어 놓을 듯한 커다란 비명소리가 일리에의 귓속을 세차게 후벼 팠다.


11화 : 조우 2


일리에는 비명의 음원을 향해 달려갔다. 샘 가에 도착해보니 그리 길지 않은 거리를 달리는 동안 일리에의 머리 속을 스쳐갔던 불길한 예감이 그대로 적중했다.

샘물 옆의 커다란 나무 아래서 라비니아와 왠 벌거숭이 소녀가 뒤엉켜 땅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벌거숭이 소녀의 얼굴은 라비니아 못지 않게 일그러져 있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여느 이빨의 두어 배는 될 듯한 날카로운 송곳니가 눈 앞의 희생양을 놓고 침을 질질 흘리며 탐욕에 젖어 있다는 점이었다. 송곳니는 끊임없이 라비니아의 목을 향해 달려들었고 라비니아는 그 괴물의 머리카락과 목을 뒤로 밀며 엎치락거리고 있었다.

일리에는 이대로 달아나야 할지 라비니아를 구해줘야 할지 곧바로 판단이 서지 않았다. 달아나는 것이야 쉽지만 그 소녀의 안내를 받으면 정오 전까지 확실하게 아우스터즈의 마을에 도착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를 돕자니 일전의 뱀파이어가 살 거죽을 후벼대며 휘둘렀던 도끼 같은 손톱의 공포가 되살아났다. 게다가 지금으로써는 아우스터즈가 된다는 것이 그리 내키지도 않았다.

‘어쨌든 이 자리는 위험하다. 저 놈과 싸울 시간에 차라리 1초라도 빨리 마을로 가는 편이 났지.’

일리에는 소리내지 않도록 천천히 뒷걸음치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라비니아의 눈동자가 그의 모습을 발견해내고 말았다.

“아저씨! 여기... 여기에요!!”

그 아이는 쇳소리를 내가면서 소리쳤다. 그 바람에 라비니아와 엉켜있던 뱀파이어도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 망할....”

일리에는 그대로 뒤를 향해 내달렸다. 하지만 채 열 걸음도 가기 전에 어깨 위로 무언가가 묵직한 것이 내려앉았다. 일리에는 균형을 잃으며 언덕 아래로 꼬꾸라졌다. 넘어지며 튀어나와있던 나무뿌리에 머리를 부딪히고 말았다. 눈 앞이 번쩍거리며 골이 울렸다.

아픈 머리를 신경 쓸 새도 없었다. 몸을 일으켜 도망가는 것이 우선이었다.

하지만 일리에의 몸은 이미 흉측한 뱀파이어의 손에 움직임을 봉쇄당하고 있었다.

‘또 다시 당하고 마는 것인가?’

뱀파이어는 이미 일리에의 턱을 들어 올리며 시커멓게 뚫려있는 두 개의 구멍 옆에 또 다시 징그러운 송곳니를 밀어 넣으려 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어차피 틀렸다. 뱀파이어에게 물려버린 상태에서 한번쯤 더 피를 빨린다고 한들 크게 달라질 것도 없을 것 같았다. 체념해버린 일리에는 눈을 감은 채 그저 그 뱀파이어가 주린 배를 채운 후 곱게 사라져주기만을 바랬다. 또다시 뱀파이어의 날카로운 이빨이 목덜미에서 팔딱거리고 있는 동맥을 꿰뚫으려는 순간 퍼석 하는 소리와 함께 일리에의 이마위로 뜨뜻한 액체가 떨어졌다.

라비니아가 사람 머리통만한 바위를 뱀파이어의 뒤통수위로 떨어트린 것이었다.

바위는 뱀파이어의 머리에서 흘러 하마터면 일리에의 얼굴 위를 덮칠 뻔 하였다.

“꾸에에엑-!”

뱀파이어는 괴성을 지르며 휘청거렸고 일리에는 그 틈을 타 몸을 비틀어 빠져 나왔다.

라비니아는 용감하게도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있는 뱀파이어의 목을 움켜쥐고는 다른 손으로 어깨를 밀쳐 나무 기둥으로 몰아붙였다. 괴물은 피가 새어 들어갔는지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한 채 손톱을 세워 마구 휘둘렀다. 라비니아의 옷이 갈갈이 찢겨져 나갔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일리에는 그 장면을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뱀파이어의 무서운 손톱에 라비니아의 몸이 곧 만신창이가 되어 부서져 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떨어져 나가는 것은 찢어진 옷 조각들뿐이었다. 라비니아의 몸에는 평행한 네 줄의 긁힌 자국만이 남았다.

“아저씨, 빨리....”

라비니아가 소리치자 일리에는 그제서야 깨어난 듯 저만치에서 뒹굴고 있던 칼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라비니아의 옆쪽으로 다가섰다. 하지만 어쩌지도 못한 채 엉덩이를 주욱 빼고 뱀파이어를 노려볼 뿐이었다. 치켜든 칼 끝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마을에서 장난꾸러기로 소문난 일리에였지만 칼로는 창고의 들쥐조차 찔러본 적이 없었다.

‘칼은 싫다. 보기만 해도 싫다. 칼날을 오래 쳐다보고 있자면 눈알을 후벼내는 것 같다. 이게 거죽을 뚫고 뼈에서 붙어 나오는 근육의 말단을 끊어내는 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행여나 뼈마디의 물렁뼈를 긁고 들어가거나, 눈알을 찌르고 코를 자르거나, 이빨을 부숴내고 혀와 볼 살을 자르거나, 갈라진 뱃속에서 끊어진 내장의 일부가 칼끝에 딸려 나오는 건 생각하기조차 싫다. 누가 나한테 진심으로 칼을 들이댄다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기절해버릴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상대에게 그런 고통을 안겨주는 감각이 손잡이로 전해진다면... 그건 내가 당하는 것보다도 더 끔찍할 것 같다.’

일리에는 늘 그렇게 생각해왔다. 겁쟁이 일리에, 겁쟁이 일리에, 겁쟁이 일리에, 겁쟁이 일리에, 겁쟁이 일리에, 겁쟁이 일리에, 겁쟁이 일리에, 겁쟁이 일리에, 겁쟁이 일리에.... 막사에서 그를 비웃던 동료들의 목소리가 귓구멍을 가득 메우며 끊임없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심장이 폭발할 듯이 뛰고 있었다.

“아저씨!!”

일리에가 망설이고 있는 사이에 놈이 한쪽 눈을 뜨고 라비니아를 밀쳐내려 하고 있었다. 머리 속이 새하얀 빛에 휩싸이며 일리에의 칼날이 떨림을 멈추었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칼날은 어느 틈에 뱀파이어의 입 천정을 통해 뒤통수를 꿰뚫고 나무 기둥까지 박혀있었다. 그러나 산허리를 타고 새벽잠에 취해있던 숲 속의 동물들을 일시에 깨워버린 처절한 비명소리는 다름아닌 일리에의 것이었다.


12화 : 껍질 1


라비니아는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죽어버린 어린 뱀파이어의 피를 잔뜩 뒤집어쓴 채 그대로 그를 누르고 있었다.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핏물 때문에 눈도 뜨지 못하고 숨쉬기도 멈춘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일리에 역시 칼자루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자신이 저질러 버린 상황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간신히 인식의 수면위로 고개를 들게 되고서야 메두사의 눈빛에 돌처럼 굳어버린 듯한 자신의 몸을 움직여 보려 하였다.

우선 칼에서 손을 떼려 했지만 오른손가락으로 자루를 하도 세게 움켜쥐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일리에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아직도 뱀파이어를 잡아 누르고 있던 라비니아에게로 시선이 옮겨갔다.

“...이제 괜찮아. 나와도 돼.”

일리에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라비니아는 천천히 한쪽 눈을 뜨더니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그리고 엉덩이로 기어 일리에의 칼날 밑을 빠져 나왔다.

일리에는 라비니아가 나오는 것을 보고는 왼손으로 오른손 검지부터 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지까지 푼 후에야 간신히 칼에서 손을 뗄 수 있었다.

“후우....”

숨을 깊게 내쉬고서는 라비니아를 돌아보았다. 피를 한 가득 덮어 쓴 채 질린 표정으로 뱀파이어를 쳐다보다가 일리에와 시선이 마주쳤다.

“괜찮니?”

라비니아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울음을 터트렸다. 인간이 아닌데다 뱀파이어의 손톱에 상처하나 입지 않으며 나이에 비해 무서운 힘을 가졌다 하더라도 역시 어린 여자아이일 뿐이었다. 일리에는 들썩거리는 그 아이의 어깨를 다독거려주며 뱀파이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괴물은 나무에 머리가 꿰 뚫린 채 처참하게 매달려있었다. 칼 끝이 앞니를 박살내며 입 속을 통해 머리통을 부숴버렸고, 그 주검의 체중으로 인해 서서히 인중까지 가르고 있었다. 그는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을 간신히 참아내었다. 그나마 이 녀석이 충분히 괴물 같은 생김새를 가지고 있기에 망정이었지 하마터면 또 한번 쏟아낼 것 없는 위 속을 뒤집어 놓을 판이었다.

일리에는 한쪽발로 괴물의 가슴을 밟아 받치고는 두 손으로 다시 칼자루를 감싸 쥐었다. 고개를 돌리고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칼날을 힘껏 잡아당겼다. 다시 한번 핏방울이 튀어 올랐고 얼굴 뼈을 갉아대는 기분 나쁜 느낌이 손바닥을 통해 귀 끝까지 저리게 하였다. 괴물의 시신은 힘없이 나무 기둥에서 미끄러져 내렸다.

일리에는 피도 닦지 않고서 칼집 속으로 날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훌쩍이고 있던 라비니아를 일으켜 세웠다.

“자, 이제 괜찮다. 괜찮아.... 어서 마을로 가야지.”

그는 제법 침착하게 아이를 달래었다. 라비니아도 눈물을 훔쳐내며 말했다.

“...네.”

피와 눈물로 얼룩져 번진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그 물통은 가지고 왔니?”

“위에 있어요.”

“그래? 흠, 그럼....”

또 이런 괴물 같은 녀석을 만나게 되는 것은 곤란했다. 하지만 이 아이를 또 혼자 보낼 수는 없었다.

“꼭... 필요한 거지?”

“그게 없으면 아저씨를 치료할 약도 만들지 못하는 걸요.”

뱀파이어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런 약 따윈 아무래도 좋았지만 막상 겪고 보니 선택의 여지가 없다면 그래도 인간의 마음을 잃지 않은 아우스터즈 쪽이 나은 것 같았다. 또 좀 전에 보여준 이 아이의 용기가 없었더라면 자신은 또 다시 뱀파이어에게 남은 피를 몽땅 빨리고 미이라처럼 가죽만 남아 죽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구나. 그럼 함께 갔다 오도록 하자.”

“네.”

그 아이는 안심이 되는 듯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13화 : 껍질 2


어느새 여명이 산등성이의 윤곽을 드러내주고 있었다. 숲은 아직 짙은 그림자에 녹아 있었지만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서서히 생기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조용히 주변을 살피며 언덕을 올랐다.

샘가에는 다행히 아무런 생명의 움직임을 찾아낼 수 없었다. 라비니아가 물병을 주워 드는 동안 일리에는 기묘한 빛을 뿜고 있는 샘물에 시선을 빼앗겼다. 여명아래 드러난 샘물의 빛깔은 진하디 진한 붉은 색이었다. 마치 무언가가 여기서 피를 토하며 죽어버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는 거대 괴물의 동맥을 수원으로 물결치듯 왈칵왈칵 쏟아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건 뭐지?”

“네?”

“이 샘물은 뭐냐고.... 왜 이렇게 붉은 거야?”

“피의 샘물이니까 당연히 빨갛죠.”

“피의 샘물...?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일리에는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라비니아는 변덕이라도 부리는 듯이 뒤죽박죽 변하는 그의 태도에 또 다시 겁을 집어먹었다.

“그러니까… 어린 뱀파이어들은 이걸 먹고 커요. 그래서 ‘안드리아의 젖줄’ 이라고도 하고요.”

“안드리아?”

“예. 뱀파이어의 어머니라고 불리는데 저 언덕너머의 생명목에 산대요.”

“.......”

무엇에 대퇴부를 얻어맞기라도 한 듯 일리에의 머리 속이 멍해져 버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햇빛을 받으면 보통 샘물처럼 변해요. 하루 중 이 샘물의 빛깔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때는 해 뜨기 직전과 해가 진 직후뿐이에요.”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보다 사람이 이걸 마시면 어떻게 되는 지나 말해봐.”

“낮에는 보통 물이랑 똑같아요. 그리고 밤에는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대요.”

“나처럼 뱀파이어한테 물린 사람이 마시면?”

“이걸 마셨었나요?”

“...그래.”

“큰일이네요. 그럼 빨리 마을로 가야 되요. 뱀파이어한테 물린 사람은 죽기 전에 피를 마셔야 살수 있대요. 하지만 피를 마시면 얼마 지나지 않아 뱀파이어가 되어버리고요.”

그제서야 모든 의문들이 풀렸다. 그를 괴롭혔던 지독한 갈증은 물을 마셔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10키로 밖의 샘물을 감지할 수 있었던 것도 몸이 서서히 괴물로 변해가며 피를 갈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샘물의 따스함도 포근함도 납득이 되었다. 또 아까의 뱀파이어 머리통을 단번에 꿰뚫었던 놀라운 힘도 그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일리에는 일전에 입었던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끓어오르던 살덩어리들은 간데 없이 완전히 아물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젠 구역질도 올라오지 않았다. 피를 마셨기 때문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 자체가 역겹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피의 샘물을 목구멍에 넘기는 순간에 느껴졌던 생명을 삼키는 듯한 감각은 지금도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었다. 다만 자신이 괴물로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두려울 뿐이었다.

“시간이 없어요.”

라비니아는 생각에 잠겨있던 일리에를 흔들어 깨웠다.

“그래.”

그들은 다시 언덕 아래로 향하였다. 빠른 걸음으로 산길을 내려가던 일리에는 생각을 바꾼 듯 라비니아를 불러 세웠다.

“라비니아, 업혀라.”

라비니아가 머뭇거리자 그는 큰소리로 재촉했다.

“어서!”

라비니아가 그의 등에 업혀 두 팔로 목을 감싸자 일리에는 그 아이가 가리키는 길을 따라 뛰어내려가기 시작했다.


14화 : 조우 3


여명의 시간이 끝나가며 해가 완전히 고개를 내밀었다.

라비니아를 업은 채 벌써 한 시간 가까이 달리고 있는데 숨이 가빠오지도 않고 피로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일리에는 점차 한계라고 생각했던 속도의 벽을 깨나가고 있었다. 이 속도라면 곧 아우스터즈의 마을이 보일 것만 같았다. 아니 그보다는 지금 몸으로 직접 느끼고 있는 새로운 세계에 그는 점차 빠져들고 있었다.

“이봐, 이대로 길 따라 쭉 가는 거 맞지?”

일리에는 등뒤에 업힌 라비니아를 향해 말했다. 하지만 라비니아는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와 내리막길을 뛰어내려가며 전해져 오는 주기적인 충격량의 공포 속에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있었다.

“아저씨..., 조금만 천천히 가면 안돼요?”

“뭐?”

“조금만 천천히 가자고요.”

라비니아는 소리치듯 대답했다.

“그래?”

기분 좋게 속도를 올려가던 일리에는 못내 아쉬운 듯 발 놀림을 조금 늦추었다.

“이제 됐냐?”

“예....”

“그럼 길이나 좀 봐봐. 이쪽이 맞아?”

라비니아는 아직도 무섭긴 마찬가지였지만 간신히 눈을 뜨고는 길을 살피며 대답했다.

“예, 이제 곧 계곡이 나올 거에요. 오른쪽으로 가면 구름다리가 있으니까 그 쪽으로 건너가면 되요.”

“그럼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거야?”

“구름다리가 아마 마을에서 중간지점쯤 될 거에요.”

“...그렇구나.”

앞으로 한 시간 정도.... 시간이 그리 충분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꽉 잡고 무서워도 조금만 참아라.”

일리에는 발끝에 힘을 주며 다시 내달렸다.

숲에서 빠져 나오자 다리를 멈추고 주변을 살폈다. 50미터쯤 앞에는 깊은 계곡이 대지의 밑바닥을 향해 뿌리를 뻗고 있었다.

“저쪽이에요.”

라비니아는 오른편의 저 멀리에 놓여진 구름다리를 가리켰다.

“어? 저건 뭐지?”

구름다리 앞에는 발을 탄 기사들이 줄을 지어 서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100기는 족히 넘는 듯했다.

일리에는 얼른 나무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뭐 하는 녀석들이지? 갑옷을 보아하니 모두 귀족 출신 같은데....”

그들은 모두 육중한 갑옷으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아침 해를 받아 번쩍거리는 두툼한 갑옷과 키의 세 배는 족히 될 듯한 긴 창은 보는 상대의 기를 질리게 하기에 충분해 보였다. 물론 그것이 보통의 인간을 상대로 한다면 말이다.

그들은 삐걱거리는 다리가 무너질 것을 염려해서인지 한 명씩 차례대로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반대편에는 아직 구름다리를 건너지 못한 기사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수행원처럼 보이는 자들이 마차에서 짐을 내리고 있었다.

“그래도 깃발을 보아하니 뱀파이어는 아닌 것 같군.”

깃발에는 왕가의 문장이 수 놓여 있었고, 그 아래로 십자가를 둘러싼 방패 모양 뒤로 칼과 창이 겹쳐진 군 마크가 그려져 있었다. 지금까지 한번도 보지 못했던 마크였다.

‘정부에서 새로이 보낸 군대인가?’

지금 그들에게 붙잡힐 수는 없었다. 탈주병이라는 것을 눈치채면 그를 즉각 처형을 해버릴 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제 어쩌죠?”

“글쎄.... 제길, 저기말고는 갈 수 있는 곳이 없는 거냐?”

“저쪽 반대편으로 한참 올라가다 보면 다리가 하나 더 있긴 해요. 하지만 너무 오래 걸릴 걸요.”

“얼마나 올라가야 하지?”

“뛰어가면 한 2,30분 정도...?”

“그럼 그 쪽에서 바로 마을로 갈 수 있는 길은 있는 거야?”

“아니요. 다시 저쪽 건너편까지 내려와야 해요.”

그렇다면 돌아오는 시간까지 4,50분을 낭비해야 한다. 게다가 돌아온 후에도 건너편에 병사들이 남아있다면 괜한 헛걸음만 하는 샘이다.

“후-, 미치겠군.”

“...저 때문에 지나갈 수 없다면 먼저 마을로 가세요. 전 기다리고 있다가 나중에 갈게요.”

“뭐?” 일리에는 라비니아의 말에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얼굴이 좀 흉하기는 하지만 조금 전부터 이 영리하고 귀여운 아이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대신 이 물병을 마을로 가져다 주세요.”

일리에는 라비니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그게 좋겠다.”

일리에는 갑옷과 무기를 벗어 던지며 말했다.

“마을은 어떻게 가야 하지?”

“일단 다리를 건너면 숲 가를 따라 쭉 내려가세요. 아, 그리고 이것을 가져가세요.”

라비니아는 목에서 나무 부적 같은 것이 매달린 목걸이를 벗어 일리에에게 주었다.

“이건 뭐지?”

“외부인이 침입하지 못하게 마을에 결계가 쳐져 있어요. 아우스터즈가 아니면 마을로 통하는 숲의 입구를 보지 못하거든요. 하지만 이것을 가지고 있으면 보초가 부를 거에요. 특히 붉은 바위가 보이는 곳부터는 잘 보이는 곳에 걸고 있어야 해요.”

일리에는 그것을 받아 안주머니 속으로 깊이 찔러 넣었다.

“그래 알았다. 이 갑옷은 가지고 오기 힘들 테니까.... 너 여기 기억할 수 있니?”

“그럼요. 이 근방에 실프가 살고 있는 나무는 이것뿐인 걸요.”

“실프?”

“나무의 정령이에요. 이 실프는 게을러서 맨날 잠만 자는 편이지만요.”

“그래? 알았다.”

이상한 소리였지만 어쨌든 이 나무를 다시 찾아오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았다. 일리에는 갑옷과 칼을 나무 아래의 덤불 속에 감추었다.

“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저들이 완전히 사라지기까지 여기서 나오지 말아라. 그럼 있다 보자.”

일리에는 라비니아에게 가볍게 미소 짓고는 구름 다리를 향해 걸어갔다. 미친 듯이 내달렸을 때도 조용했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하며 관자놀이를 서서히 울려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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